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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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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설교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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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8:16~22절 “내가 머문 그 자리 하나님 계시고 하늘의 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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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3-09-30 13:02    조회 510    댓글 0  
 
창28:16~22절 “내가 머문 그 자리 하나님 계시고 하늘의 문이 됩니다.” 10.1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잖아요. 당신의 말만 무조건 듣는 주인이 조종하는 로보트 같은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인간 스스로 느끼며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셨다는 거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이지만 자기 멋대로 살라는 뜻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나 아담의 죄성이 유전된 인간은 자기 멋대로 살게 되었다는 거잖아요 오늘 야심이 많아서 형의 것을 가로채던 삶을 살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어찌 달라졌는지 살펴보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6절을 보시지요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기 <과연> 히브리어 <아켄>은 <참으로> 또는 <분명히>란 의미로 감격을 담고 있는 단어라는 거거든요 무엇에 대한 감격입니까? 하나님 여호와께서 진실로 여기 계시거늘 몰랐다는 거잖아요 고향 브엘세바에서는 아버지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꼈었지만 황량한 벌판 그것도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이곳 낯선 땅에 여호와하나님이 계신다는 건 전혀 상상 못했는데 여기에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놀라움의 감격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왜 그랬을까요? 그 당시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지배적인 생각이 나라와 지역마다 다스리는 신이 따로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거지요 렘23:23~2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야곱은 지금 광야에서 혼자 외롭고 무서웠을 때, 미래에 대해 무거운 마음과 두려움에 있을 때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보게 된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열어주셨잖아요. 그런 우리에게 어려울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비결을 말씀하잖아요. 잠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지금 야곱은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잖아요. 뭡니까? 여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마음속에 모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하나님을 뵙고 서야 깨달았다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야곱처럼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잘못이 많은 인생인지 회개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선지자도 사6:5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을 만나니 입술이 부정한 자들과 같은 역시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마22:12절에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되거든요 왜냐하면 이 예복은 죄를 가리고 덮어버리는 능력이거든요 그러나 이 사람은 이 소중한 예복에 대해 평상시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섰다는 거고 하나님이 예복을 입지 않은 것에 대해 물으신 건데 이 세상에 있을 때 입을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모두 다 놓쳐버린 겁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아무 말도 못했다 거지요 왜요? 하나님 앞에 서니 자기 죄가 모두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모두 씻어내고 덮어버리는 그 예복은 무엇입니까? 갈3: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내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로 살았음을 믿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례요 세례는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했음의 표인데 이것을 뭐라고 한다구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말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 옷 입어야지 하나님 앞에서는 늦습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이 피하여 도망갈 수밖에 없고 인생의 최대 위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야곱을 보면서 고난은 나의 신앙적 유익을 가져다줌을 믿으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절을 보자구요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두렵도다> 히브리어 <마, 얼마나/ 노라, 떨리는지> 이 곳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마 노라> <두렵도다>라고 야곱이 말하고 있는 거지요 오늘날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요? 아니요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망령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진정 떨리는 경외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모두 아시지요 경외함의 두려워함으로 하나님께 나오는지를 아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거 아닙니까? 시31:19절에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오늘 우리 모두 쌓아두신 은혜를, 베푸시는 큰 은혜를 받으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황량한 벌판 사람도 살지 않는 광야인 이곳 낯선 땅이지만 이곳이 바로 <뻬트 엘로힘> <하나님의 집> 거룩하신 하나님의 집이니까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겁니다. 성전이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만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깨닫는 것이 뭡니까? 훌륭하게 성물들을 갖춰서 성전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멋있게 건물을 지어서 성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함을 깨닫지요.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고 훌륭한 것들을 갖추고 있어도 하나님이 이곳에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건물이지 성전이 아니라는 거 아닙니까? 빈들이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라 할지라도 거기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야곱과 만나주시면 바로 거기가 뻬트 엘로힘,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엔 분명 건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전3: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속에 누가 계시니까 성령님 그래서 우리가 헬라어 <나오스 데우>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절을 보실까요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하기 만한 광야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만나주신 이 놀랍기만한 감격스러움에 대해 야곱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돌 베게 했던 것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는 겁니다. 뭡니까? 성별의 의미이고 하나님을 만난 것과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는 임재에 대해 기념의 의미라는 거거든요
19절입니다.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이곳의 이름이 루스랍니다. 아몬드열매를 내는 편도나무란 의미라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거하는 곳이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모든 걸 갖춘 사람이라도 예수 없으면 의미가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 없는 이곳에 도망가는 자 야곱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더 이상 이곳을 루스라고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벧엘이라고 하였다는 겁니다. 창12:8절에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루스를 야곱이 지은 벧엘로 아예 기록하고 있음을 봅니다. 동쪽 아이 성은 4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백성들이 패전한 곳이잖아요. 뭡니까? 야곱이 이곳을 지나가기 전 이미 그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머물러 제단을 쌓았던 역사적인 곳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20~22절에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께 誓願(서원)했다는 것은 맹세하며 소원했다는 건데 어떤 서원입니까? 나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사 지금의 돌 제단을 하나님의 집으로 세울 거고 십분의 일을 드리겠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께 흥정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여기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히브리어 <하야>는 <되다>란 의미보다는 <~존재로 있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내 말 들어주시면 내 하나님이 되실 거고 그렇지 않으면 내 하나님이 되시지 못하실 거라는 조건을 내건 기도라기보다는 원문의 의미는 <여호와께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번역이라는 겁니다. 이는 은혜 받은 자의 고백이잖아요 합3: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리고 <반드시 십분의 일을 드리겠나이다> 여기 <십일조>라는 단어가 우리 성경에는 한 번이지만 원문에는 십일조가 두 번 나오면서 강조하고 있다는 건데 먼저 나오는 <십분의 일> <앗세르>는 절대형이라는 거고 나중 나오는 <십일조> 히브리어 <아앗세렌누>는 미완료형 단어로 원문대로 해석하면 <내가 십분의 일을 취해 내 평생에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라는 겁니다. 십일조라는 것이 율법으로 정해지기 전에 은혜 받은 하나님을 만난 자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신앙고백형 결단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정리해 봅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신 줄 알고 내가 있는 그 자리를 기도와 예배의 자리로 삼는다면 거기가 하나님의 전이 되고 바로 그곳이 하늘로 통하는 문이 되는 것을 늘 경험하며 사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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