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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13~35절 “우리도 유쾌한 사람들로 살아야 할 이유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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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3-04-14 15:42    조회 680    댓글 0  
 
눅24:13~35절  “우리도 유쾌한 사람들로 살아야 할 이유를 가졌다”  2023.4.16.
인도의 선교사로 선교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스탠리 존스는 89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인해 몸 반쪽을 못 쓰게 되었을 때 그의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미국의 보스턴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시키게 되었습니다. 진찰을 위해 자신의 병실을 찾는 의사에게 <의사선생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시오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 여러 번 거듭해서 부탁했으므로 치료차 스탠리존스의 병실을 찾는 의사나 간호사는 문을 열고 들어와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스탠리 존스는 <아멘> 이렇게 입원한지 육개월 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고 그 이듬해 구십세에 다시 인도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는 겁니다. 부활신앙이지요
13절을 볼까요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원문에는 <그 날에> 앞에 헬라어 접속사 <카이> <그리고>로 시작이 되고 있고 그리고 바로 뒤에 헬라어 <이두> 감탄사지요 <보라>가 있다는 거지요 12절에선 베드로가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 빈 무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카이 이두>, <그리고 보라> 반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들 중 둘이랍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라니까 약 십일 킬로 되는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는 거지요 (엠마오사진) 15절을 보자구요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카이 이두> <그리고 보라>라고 시작했구나 깨닫게 하지요 뭡니까? 무덤에서 시신으로 있어야 할 예수님이 사라졌다는 건데 놀라운 것이 지금 두 제자와 가까이 동행하시더라는 거 아닙니까?
이것이 빈 무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제자들이 와서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에 대한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사실임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여기 <예수께서> 원문엔 <예수께서> 앞에 헬라어 <아우토스> <친히>가 있어 친히 예수께서 가까이 두 제자와 함께 동행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셨음에도 완벽한 육체의 모습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16절에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여기 눈이 <가리어져> 헬라어 <에크라툰토>는 <억제당하고 있는>이란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고 장사지내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억제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자신들과 동행하시는 이가 예수시랴 했다는 겁니다.
17절을 보시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예수님이 두 제자가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의 주제를 물어보셨을 때 두 제자의 얼굴표정이 슬픈 빛을 띠면서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는 거거든요 왜 슬픈 빛이었을까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신보다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장사지냈다는 확신이 더 컸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파이드로스>는 <유쾌한>인데 이것의 반대가 되는 헬라어 <스퀴드로스>가 <슬픈, 우울한>이란 거지요 왜 우울하며 왜 슬픈 겁니까?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이 났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어서고 부활하셨다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라는 거거든요 자! 18절에 드디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누군지를 말하지요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글로바, 헬라음으로 클레오파스, <유명한 아버지>라는 의미거든요 글로바가 예수님을 향해서 아니 이걸 모르시오 三尺童子(삼척동자)도 다 아는 걸 어째 혼자만 모르시오 그렇다면 뭡니까? 예수님의 나귀타고 왕으로서의 입성과 성전에서 관행처럼 굳어진 돈 바꾸는 자들과 가축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을 알리셨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 고난으로 죽으시고 이때 하늘이 빛이 하나도 없이 어두워졌고 지진으로 무덤이 열리고 그리고 장사지내 무덤에 갇히신 일은 그 당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참 진리의 소식은 세상에서 결코 얻지 못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 얻음을 믿습니다.

19~20절을 보자구요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신지식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것과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는 겁니다. 원문에는 말과 일이 아닌 일과 말이라는 거거든요 왜요? 사람들은 말에는 능하지만 일에는 약하다는 거지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은 쉬워 그러나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중풍병자에게 하신 일은 아무나 못해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가 누구셨습니까? 그저 일과 말에 능한 선지자였습니까? 눅9: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하나님이 사람으로 아들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의 죄로 인해 가로막고 있는 담을 허물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하시려 오신 그리스도신 건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란 견해를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요 누가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까? 대제사장들인 종교지도자들과 관리들인 정치지도자들이 그렇다면 이들이 이스라엘백성을 대표한다면 이스라엘백성 모두를 이야기하는 거고 우리도 해당된다는 거거든요 그러므로 딤전1: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실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대제사장 관원들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뭡니까? 사53:5~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에 대해 롬6: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십자가에 과거의 내가 죽고 하나님의 아들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 난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는 21절에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여기 <속량하다> 헬라어 <뤼트루스다이>는 죄에서의 속량이 아닌 정치적인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의미하는데 이 속량을 <바랐노라> 헬라어 <엘피조멘>은 미완료형 단어로 <바라고 또 바라다>니까 얼마나 이스라엘의 회복을 열망하였는지를 알려준다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아니라 막1:15절에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죄에서 구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선포하셨던 겁니다.
22~24절에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여기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음을 여자들도 그리고 자신들과 함께 한 두 어 사람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거지요 이 일은 글로바와 다른 제자를 <놀라게 하였다> 헬라어 <엑세스테산>은 <위치와 감각에서 벗어나게>니까 충격적 놀라움이라는 겁니다. 이 충격적 놀라움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배우기 원합니다.

25~27절을 볼까요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18:31절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눅22:37절에도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그런데 지금 글로바와 다른 제자들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까지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시22:16~18절에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십자가 고난에 대한 시편기자의 예언이었잖아요 그런데 왜 이 뻔한 것을 믿지 못했을까요? 고난엔 관심이 없고 오직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정치적 회복에만 <다윗의 때>만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우리도 그렇지요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 또한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은 영광을 위한 디딤돌임을 알자구요 욥23: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빌2:8~9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8~29절에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이렇게 강권한 이유가 뭡니까? 32절에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30절에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이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에서 떡을 주시던 모습이잖아요 그렇습니다. 31절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영의 눈이 뜨여지고 예수님인 줄 알아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에서 깨달아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3절에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엠마오로 갈 때 헬라어 <스퀴드로스> 슬프고 우울했는데 부활의 주님을 확인한 후 헬라어 <파이드로스> 유쾌한 이들로 변했고 다시 11킬로미터를 걸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거 아닙니까? 이것이 회개이고 회개의 능력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도착해 보니 열한 제자와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있더라는 건데 34절에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그래서 자신들이 만난 부활의 주님을 35절에 이야기했다는 거지요 우리 모두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처럼 되자고요.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뜨거움을 얻으며 부활신앙을 통해 슬픔과 우울감에서 벗어나 유쾌한 이들로 변해지며 받은 은혜를 나누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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