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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7:8~16절 “오늘을 주의 말씀대로 살면 내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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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2-12-09 13:59    조회 1,083    댓글 0  
 
왕상17:8~16절 “오늘을 주의 말씀대로 살면 내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 2022.12.11.
세상의 모든 것엔 때가 있답니다. 그래서 전도서기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때를 잃어버리는 것은 버스 지나간 후에 손을 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요 종은 울리기 전엔 종이 아니요 노래는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며 사랑은 표현하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랍니다. 기도도 기도하기 전에는 기도가 아니고 찬양도 입술을 통해 나오기 전에는 찬양이 아닙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때임을 기억하고 서로 권하십시다. 때를 잃기 전에 찬양에 쓰임 받고 기도에 쓰임 받자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를 따라 순종하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시는 교훈에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8~9절을 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뭘 깨닫습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이스라엘백성들하고는 다르게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고 엘리야에게 지금 있는 그릿시냇가를 떠나 이방인의 땅 시돈으로 가라는 것과 그곳 시돈에 사는 과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을 내리셨다는 겁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멀리 시돈 사르밧 과부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보이지 않으나 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거지요
마치 인간의 눈으로는 절대 못 보는 것을 내시경의 아주 작은 CCD 카메라는 위나 장의 내면을 세밀하게 살펴서 용종의 상태나 염증부위를 정확하게 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사람은 못 보는데 하나님은 모두 다 아신다는 거잖아요 행1:24절에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눈과 달리 영적인 내시경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신다는 거지요 꿰뚤어만 보시나요 그 마음을 움직이기까지 하신다는 거 아닙니까? 시인 정채봉님의 <내 가슴속의 램프>라는 글에 “어느 마을의 시장에 사람의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정치가를 찍었더니 술과 여자가 찍혀 나왔습니다. 어떤 남자는 늑대가 찍혀 나오고 어떤 여자는 여우가 찍혀 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시장에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무시무시한 무기가 찍혀 나올거야’ 사나이가 카메라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모습이 찍혔습니다. 방긋 웃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찍혔을 뿐 사나이는 단지 미역 한 꾸러미만 들고 시장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사진기가 우리 인간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가 생각합니다. 만일 사람의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찍어댄다면 실제 하는 말과 다른 그렇지 않은 마음을 들켜 민망한 일이 생길 거고 얼굴과는 다른 부끄러운 부분도 드러날 게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 내세울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렘17:9~10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사실 그대로 보시는 영적인 사진기를 가지고 계시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시돈의 사르밧이랍니다. 여기 ‘사르밧’은 히브리발음으로 ‘차르파트’인데 ‘염색하다’는 의미니까 염색공업이 발달된 지역이었다는 걸 알게 되지요 이곳에 사는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여기 ‘명령하다’ 히브리어 ‘치위’는 ‘치와’의 완료형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라고 실제로 명령하시지 않았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 것을 요구할 때 엘리야 선지자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마음을 ‘치와’ 이미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읽지 않았습니다만 4절에 뭐랍니까?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여기 까마귀들에게 ‘명령하다’ 히브리어 ‘치위’가 9절의 ‘명령하다’ ‘치위’와 같다는 거지요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까마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엘리야 선지자에게 날라 주도록 하나님이 이미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미물의 본능까지 움직이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성경은 그런 하나님께 네 짐을 맡기라잖아요. 시55: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는 자처럼 복 있는 자가 없음을 믿고 맡기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11절을 보자구요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여기 ‘그가 일어나’ 앞에 히브리어 ‘와우’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 또 ‘사르밧으로 가서’ 앞에도 ‘와우’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원문엔 있어 ‘그가 사르밧으로 갔다’는 겁니다. 또 ‘성문에 이를 때에’ 앞에도 히브리어 ‘와우’ 접속사 ‘그리고’가 있어서 ‘그리고 그가 성문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엘리야가 연속적으로 또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연속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때 ‘웨힌네’ ‘보라’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감탄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부가 성문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모습은 마치 엘리야선지자에겐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 자신을 마중 나온 것처럼 보였다는 거지요 그리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모습에서 여자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걸 알게 하잖아요. 부유한 여인이라면 종을 시키던지 시장에서 장작을 구입하던지 그랬을 거거든요 엘리야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을 청하고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여기 ‘한 조각’ 히브리어 ‘파트’는 ‘한 입 거리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는 거지요 지난 10월26일 오후 6시 지하 205미터 봉화의 아연광산에서 아연을 채굴하던 두 사람, 한 사람은 작업반장이었고 한 사람은 신참이었는데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900톤의 토사가 수직갱도로 쏟아져 내려 올라가는 입구를 막아버렸지요 설상가상 무전기도 불통이 되었고 이 두 사람은 갱도 안 대피소로 자리를 옮겼는데 공기는 충분했지만 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젖으면 체온이 떨어져 위험할 수 있었는데 마침 버려진 비닐봉지로 체온을 유지하면서 커피믹스 삼십봉지로 십일을 버티고 구조되었던 것을 기념하며 남긴 글의 제목이 ‘무너진 광산 속에서 기적을 마시다 봉화광산사고와 커피믹스’ 하찮은 작은 것도 위기 때는 큰 도움을 주는 식량이 되듯이 이 과부에게 비록 한 입 거리 한 조각의 떡이지만 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양식이 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12절에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사실 이 과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당신의 하나님’이랍니다 이 과부는 시돈 사람이요 하나님도 믿지 않는 여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사람을 도울 아무런 명분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돕는다면 뭡니까? 이는 까마귀가 먹을 것을 나른 것 이상으로 기적이 아닐 수가 없는 거지요 엘리야의 동족인 북이스라엘백성들은 생명 없는 우상을 숭배하느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멀리하는 반면에 지금 이방의 이 여인은 여호와는 살아 계시다고 고백하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한다고 하잖습니까? 통에 한 줌의 밀가루와 병에 기름 조금인데 마지막으로 떡을 해서 먹고 이 후엔 죽으리라는 결연하기까지 한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여기 ‘한 움큼’ 히브리어 ‘멜로 카프’는 ‘멜로’는 ‘채우다’ ‘카프’는 ‘손바닥’이니까 손바닥을 채울 정도의 소량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병’도 군사가 전쟁터에 나갈 때 들고 나갈 정도의 작은 것이라는 겁니다.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은 작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보잘 것 없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기드온의 삼백 용사가 미디안 십만 군사를 물리쳤듯이 보리 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게 하셨듯이 하나님 안에서는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작은 만큼 보잘 것 없는 만큼 하나님의 기적은 더 크게 더 풍성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절을 볼까요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14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엘리야의 말에 이 사르밧 과부가 15~16절에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뭘 깨닫습니까? 이젠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절망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희망이 열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현재 이 죽을 일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면 미래를 여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눅4:25~26절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사르밧의 신약의 이름이 사렙다거든요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당신이 기억하시는 것은 누구랍니까? 이스라엘에 있는 많은 과부들이 아니라 오직 시돈 땅에 사렙다과부를 기억하고 계셨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에는 하나님께서 계속적인 보호와 끊임이 없는 사랑을 베푸신다는 걸 깨닫는 거지요 기독신문 김관선목사의 랩소디에 지구와 태양의 거리에 대해 나오더라고요 그 거리가 일억4천 구백육십만 칠천칠십 킬로미터랍니다. 그리고 태양의 열이 빛의 속도로 우리 지구에 도착하는 시간이 8분이랍니다. 그런데 지구가 태양에서 조금만 가까 워도 살 수 없고 조금만 멀어도 살 수 없는데 가장 적당한 일억 사천구백육십만 칠천칠십 킬로미터의 거리에 하나님이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난로에 너무 가까우면 뜨겁든지 데든지 아니면 타든지 너무 멀면 춥고 따뜻하지 않은 것처럼 난로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이런 우리 하나님이 말씀대로 움직이는 사르밧 과부에게 연속적인 보호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맡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편23:1절에 다윗의 고백을 우리 모두 고백해 보자구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오늘을 주의 말씀대로 살아서 내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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