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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26~28절 “문제를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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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2-09-08 21:00    조회 1,288    댓글 0  
 
롬8:26~28절    “문제를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2022.9.11.
이번 태풍 힌남노의 뜻은 라오스어에서 나온 말로 돌, 가시, 새싹이라는 의미로 아마도 강력하기 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지나가기를 원해서 붙인 이름일 겁니다. 일본의 도호쿠지방의 아오모리현의 현은 사과 꽃을 의미하는데 일본 국내 사과생산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유명하다는 거지요 지금부터 30년 전 일본 전역에 태풍 19호 미어리얼이 바로 이 아오모리현을 지나게 되면서 사과나무에 달려 있던 대부분의 사과가 떨어지고  가지가 부러지고 심지어는 사과나무가 통째로 뽑혀버리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대부분 사과농사를 짓는 아오모리현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가운데서 상품가치가 없는 떨어진 낙과를 골라서 쨈으로 만들어 팔고 그래도 괜찮은 것은 중고등학교 배식으로 돌리면서 손해를 조금이나마 최소화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나무에 달려 있는 사과는 10퍼센트 정도였는데 침울해 있던 한 농부가 역발상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90퍼센트가 떨어지는 중에도 떨어지지 않은 10퍼센트의 사과를 마침 입시철이 다가오면서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 합격사과’라고 이름 붙여서 입시생을 둔 가족들에게 높은 가격에 팔아서 태풍으로 인한 모든 손해를 다 메꿀 수가 있었다는 거거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관점의 전환이라는 거지요 대부분의 농민은 90퍼센트 떨어진 사과를 보면서 어쩌지 라고 실망하고 있을 때 다른 어떤 농부는 달린 10퍼센트의 사과를 보면서 어떻게 팔까?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 사과, 때 마침 입시를 앞둔 시기와 그들의 불안한 정서와 맞아떨어졌던 겁니다. 우리에게도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오늘 본문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뭡니까?

26절을 보자구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 ‘이와 같이’ 이전 구절에서 말씀한 것인데 보이지 않는 하늘천국에 대한 소망이,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능히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오신 성령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신다는 걸 말씀합니다. 우리를 위해 뭘 도우신답니까? 우리의 연약함이라는 거거든요 ‘연약함’ 헬라어 ‘아스데네이아’는 ‘힘이 없는 상태’라는 의미로 질병, 또는 마음이 쇠약해 짐, 또는 영적으로 매우 힘을 잃어서 비겁한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태 파악이 안 되고 제대로 기도의 핵심을 못 잡고 무능한 상태라는 거지요 이럴 때 도우실 수 있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시라는 거 아닙니까? 여기 ‘돕다’는 말은 ‘현재 함께 가담하여 열심히 하신다’는 의미로 ‘떠맡아 도우신다’는 말이 더 솔직한 표현이라는 겁니다. 토마스홉스는 1588년에 태어나 구십일 세를 살다가 간 영국의 정치철학자로 전쟁과 혁명, 내란과 공포의 시대를 살면서 그가 체험에서 나온 그의 철학적 변은 인간은 누구나 쌍둥이로 태어난다는 거지요 평상시에는 몰라도 갑작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면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마치 내 한 몸에 두 얼굴의 사나이가 함께 살고 있는 형국이라는 거지요 잔인함, 난폭함, 추악함, 야비함, 비열함, 비겁함, 두려움, 더러움 등은 우리의 내면의 감춰져 있던 또 다른 나 아닙니까? 이것을 성경도 지적하잖아요. 롬7: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도 이런 자신을 보면서 몸서리치잖아요. 롬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제일로 필요한 부분이 뭘까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주도해 나가시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고 그러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증거 해 주신데요 롬8: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넌 하나님의 자녀야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그래선 안 된다고 증언해 주신다는 거잖아요 그 다음 절에서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뭡니까? 성령 하나님은 ‘우리 이 땅의 것을 위해 존재하지 않잖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사람이잖아 이 영광을 얻기 위해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난과 슬픔 이기자’ 라고 우리 속에서 증언하신다는 거거든요 이처럼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신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7절을 보자구요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기도의 중요성도 알고 기도의 필요성도 알지만 문제는 뭡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데 있다는 거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영적으로 무지하니까 그저 세상 적이고 눈앞에 것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다가 무엇이 유익한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라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간구하세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라는 거거든요 이 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통하심으로’라는 거지요 나를 너무나 잘 아신 까닭에 우리를 위해 애통해 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신다는 거지요 우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 세상에 대해 더 많은 마음을 두고 있는 우리의 내면을 보시지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볼 때 조금만 더 공부하고 노력하면 될 것 같은데 자식은 왜 그리 딴 데에 집중하는지 인생을 먼저 살아온 부모는 자식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며 내 자식의 필요가 뭔지를 제대로 기도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속사정을 아시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통으로 성령 하나님이 기도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자신을 말뚝으로 박아대고 뾰족한 나무 조각으로 찔러대어 그때마다 자신을 주먹으로 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을 때 빨리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시기를 기도했다는 거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뭐였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과 내가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것 그리고 나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성령하나님이 깨닫게 하셨다는 거 아닙니까? 여기 ‘마음을 살피신다’ 헬라어 ‘에라우논’은 ‘철저하게 살피다’는 의미거든요 사람의 지각력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지각력은 시, 공간을 초월하시는 까닭에 정확하고 완전하다는 거지요 마10:30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렘17:10절에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884년 우리나라를 선교하기 위해 온 언더우드선교사의 기도를 들어볼까요?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사람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소망이 없던 이 백성을 일제의 아픔을 겪으면서 육이오의 전쟁수난을 겪으면서 아픔과 불행이 이 백성으로 결코 깨질 것 같지 않았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하는 백성이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런 우리 백성을 모든 나라 위에 높이 세우셨음은 한 선교사의 순종의 결단과 하나님이 이 백성의 마음을 철저하게 살피시는 ‘에라우논’으로 이 백성을 아시고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기도가 있었음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8절을 보시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헬라어 ‘오이다멘’ 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건데 그것이 뭔가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최종적으로 가장 좋은 선이 되게 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아는 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뭘까요? 저절로 좋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합력하여 이루다’ 헬라어 ‘쉬네르게이’는 ‘함께 일하다’니까 저절로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뭡니까? 하나님이 함께 일하시는 까닭에 선한 결과를 낳는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가능하다는 거잖아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뒤에서 하나님이 함께 일하심으로 그것이 고난이든 아니면 슬픔이든 아니면 질병이나 실패라도 당신의 백성인 성도에게 최종적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선’ 헬라어 ‘아가돈’이 뭐냐는 거지요 세상 성공인가? 만사형통인가? 역경이나 고난이 가져다 준 값진 열매인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설 성도의 최종적 구원을 말한다는 거거든요 이런 축복을 받는 사람은 좁을 길을 가는 지극히 적은 인원으로 제한적이라는 거지요 이들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먼저 사랑에 압도당한 부름을 받은 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이야기 아닙니까? 여기서 깨닫는 것은 구원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부르신 하나님이시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는 거고 그분이 우리의 구원의 전 여정에 함께 하셔서 마침내 최종적으로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서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는 거 기억하자구요 <오래 전 영국에서는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설교하는 자는 무조건 벌을 받는다"라며 신앙을 제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이 법을 어겨 1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그의 아내는 거지처럼 구걸하다가 죽게 되었고, 그의 세 자녀들도 졸지에 고아가 되어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 젊은이는 감옥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전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만약 제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저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젊은이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너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었노라."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그 젊은이에게 이런 환상이 보였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그 유명한 존 번연(John Bunyan)이며, 그가 쓴 책이 바로 [천로역정]입니다.> 오늘의 사람의 움직임과 좋지 않은 환경, 그리고 질병이나 실패 같은 문제 앞에서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하나님께서 이로 인해 날 부끄럼없이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는 관점의 전환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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