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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설교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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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3:20절 “난 진짜로 예수를 모신 자인가 아니면 이름만 믿는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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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2-08-25 22:06    조회 1,440    댓글 0  
 
계3:20절    “난 진짜로 예수를 모신 자인가 아니면 이름만 믿는 자인가”  2022.8.28.
짱구의 차이라는 인터넷 글에 초등학교 시험문제 중에 나왔던 문제인데 다음 중 공통점이 없는 것을 고르시오 <일 - 곰, 이 – 말, 삼 - 해, 사 - 개> 대다수 어린이들은 당연히 해 삼을 선택했고 삼이 정답이었다는 거지요 답의 공통점은 모두 동물이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마트를 운영하는 집의 짱구라는 아이가 이 문제의 답을 개라고 했다는 겁니다. 당연히 답이 틀렸지요 그러나 짱구는 매우 억울해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의를 하게 되었는데 항변인즉 우리 집 마트에 보면 곰표 밀가루가 있고 말표 구두약도 있고 해표식용유도 있는데 개표는 없었다는 거거든요 이 항의를 들은 학생들은 폭소를 금치 못했고 별명도 짱구에서 개짱구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짱구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나도 셋은 동물이고 해는 동물이 아닌 것을 왜 모르겠어? 이렇게 뻔하고 쉬운 것을 문제로 낼 거라고 생각지 않았단 말이야 뭔가 반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는 관점과 생각하는 관점에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는 거잖아요. 우리의 신앙적 태도도 나의 관점에서 맞다 생각하고 움직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해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지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두드리는 예수님성화 띄워주세요> 여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신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거잖아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놓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요 그리고 이 말씀에서 의문점이 뭡니까? 높고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죄로부터 그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그리스도이신데 절대주권자로서 우리 인간의 마음을 노크하고 계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느냐 하는 거지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림으로 그려낸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면서 짱구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거지요 뭐지, 절대주권을 가지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향해 마치 사정을 하듯 기다리며 서 계실 수 있느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미처 생각지 못했지요  똑같은 말씀과 그림을 보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시지만 한 영혼을 사랑하시기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양을 사랑하는 목자의 자세를 발견한다는 거거든요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뭘 경험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했거든요. 단순히 경험 정도가 아니라 제자로 그것도 최 측근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며 그곳이 어디라도 예수님과 같이 했다는 겁니다. 이때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주권과 같은 신적권위와 영광을 발견하기 보다는 마치 형 같은 친구 같은 스승으로 인간미를 더 느낄 수 있었다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사도요한이 경험한 예수그리스도는 인간과 가까이 격이 없이 대하시고 연약한 인간을 허물치 않고 함께 하시는 모습을 더 많이 봤다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요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변화산에서 신적인 권위와 영광을 볼 수 있었지요 오병이어의 기적과 바다를 걸어오시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었거든요 사도요한은 훗날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요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음을 선포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가? 만왕의 왕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뭡니까? 절대주권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지금 인간을 향하여 서서 기다리시며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고 계시는 끝까지 사랑하시는 목자의 사랑을 보게 되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잖아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내 안에 라고 굳게 믿는 것과는 달리 실제 삶에서는 나만이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거하시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자구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문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이 단체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라오디게아교회랍니다. 교회라면 누가 생각해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선 문을 활짝 열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문을 열라고 사정하고 계시는 것은 뭔가요? 지금 보세요. 이 모습은 분명 예수그리스도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배제당하여 있는 겁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예수그리스도가 안에 계셔야 믿는 자인데 안에 계시기보다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거에서 이게 뭐지,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지금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거잖아요.
예수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은 뭘 뜻하는 겁니까? 요1서5:11~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생명인데 예수님이 배제당하여 안 계신 것은 더 이상 그에겐 생명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분명 밖에서 보면 교회이고 성도일 텐데 예수가 없는 교회요 예수 없는 성도라는 겁니다. 사데교회가 그랬잖아요. 계3:1절에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뿐 영적으로 죽은 교회 죽은 성도였었다는 겁니다.
생명이 있는 교회가 되는 길이 무엇이며 생명이 있는 성도가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복잡하고 어렵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두드리는 예수님을 환영하여 들이는데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것을 지금 라오디게아교회는 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 교회의 태도 때문이라는 거지요 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왜 이런 태도를 가졌을까요? 17절이지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물질의 부, 풍부함이 이런 태도를 가져왔다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잘 될 때 조심하고 경계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풍족함이 있는 만큼 영적으로는 세상에 그런 가난뱅이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런 태도에 헬라어 ‘멜로 에메사이’ ‘토하여 버리리라’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또 다시 기회를 주시더라는 거지요 뭡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미국의 오크힐스교회를 담임하는 맥스 루케이도목사가 기록한 시적인 표현을 볼까요? <때때로 세상은 자네 인생의 문을 걷어차지 않나.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네. 세상의 소리들은 자네의 충성을 얻어내려 아우성을 치지 않나. 예수님은 가만가만 부드럽게 충성을 요구하신다네. 세상은 잠깐뿐인 화려한 쾌락을 약속하지. 하지만 예수님은 조용한 저녁식사를 약속하신다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를. “내가 들어가 먹으리라.” 자넨 어떤 음성을 듣고 있나?> 혹시 물질에 대한 욕심, 지금 누리고 있는 부요로 ‘멜로 에메사이’ ‘토하여 버리리라’ 경고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문밖에 어느 때까지 세워둘 것인가? 예수님의 부르심은 ‘와서 교회에 참석하라’고 하시지 않지요. 또는 ‘와서 헌금을 하라’고 하시지 않잖아요. 또 ‘와서 세례를 받으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소리내어 고백해 보자구요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다음절도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오라 그러면 너는 먹고 마시며 채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도 들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가 어느 날 한 부자로부터 저녁식사를 초대 받았답니다. 이 부자는 저녁상을 성대히 잘 차려 놓고 우찌무라간조를 극진히 대접하였습다. 선생은 식사를 잘 마치고 집을 나서면서 부자에게 인사치레를 하기를 <잘 먹었다, 이 돼지야!> 순간 부자는 심한 모멸감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는 거지요. 집에 들어온 부자는 분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 있는가? 기껏 식사 대접을 했더니, 그런 식으로밖에 인사를 못하는가? 돼먹지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잠을 못 이루며 한참 뒤척거리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마음 한구석에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우찌무라 간조는 존경받는 인물이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내게 그런 몰지각한 말을 했을까? 그분의 성품으로 보아 절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뭔가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자신의 삶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래, 내 삶이 그분이 말한 돼지와 다를 바가 뭔가? 나 혼자 이렇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버리는 것, 그러다가 끝이 나는 인생. 이게 돼지지, 별 게 돼진가!> 다음날 부자는 일찍 일어나 선생을 찾아가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찌무라간조의 <잘 먹었다 이 돼지야>가 이 부자에겐 주님의 문두드림이었고 음성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우린 어떻습니까? 먹고 자고 세상 부를 바라보며 살만 찌우는 사람은 아닌가요? 오늘 예수님 소원대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채움이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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