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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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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설교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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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5:1~7절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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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2-08-11 21:48    조회 1,490    댓글 0  
 
전5:1~7절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  2022.8.14.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또는 심장이 콩알 만해졌다고도 말하지요 또 저 사람은 강심장이야 라고도 말하고 저렇게 심장이 약해서야 어디다  쓰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지요 프랑스 시인 장루슬로의 ‘너무 작은 심장’이란 시를 소개하려 합니다. ‘작은 바람이 말했다 내가 자라면 숲을 쓰러뜨려 나무들을 가져다주어야지 추워하는 모든 이에게’ ‘작은 빵이 말했다 내가 자라면 모든 이들의 양식이 되어야지 배고픈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나 그 위로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비가 내려 바람을 잠재우고 빵을 녹여버렸지 예전과 같이 되었다네.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 만일 빵이 부족하고 세상이 춥다면 그것은 비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장이 너무 작은 심장을 가졌기 때문이지’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심장이 작은 탓에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인데 그 답을 내게서 찾기 보다는 외부에서 찾으려하고 일이 안되거나 못하게 될 때 내 심장이 작은 탓 보다는 환경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병든 심장을 발견하고 주의 심장으로 다시 새롭게 서는 귀한 은혜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1절을 볼까요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왔지요 그런데 성전을 들어갈 때 성도들아 발을 삼가랍니다. 히브리어 ‘쉐모르, 삼가라, 라글레카, 네 발을’ 발을 삼가라는 말은 무슨 말씀일까요? 용서와 긍휼을 바라며 나오기 보다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오는 발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는 거잖아요. 경계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갈6: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사람의 시선에만 관심 두는 위선을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피신다는 걸 기억하면서 주님의 임재와 용서를 구하는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면서 발을 삼가는데서 예배드리는 자가 두 가지로 그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거지요 발을 삼간 이가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모습과 발을 삼가지 못한 이가 오늘 예배를 드렸다는데 만족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뭡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듣고자 하는가 아니면 예배행위 자체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느냐 하는 거지요 또 발을 삼간이가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전의식으로 성전에 들어와 예배에 임한다는 거고 발을 삼가지 못한 이는 신전의식이 없는 상태로 성전에 들어와 그냥 한 시간의 예배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거잖아요 이 둘의 결과는 신전의식이 있는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마음 깊은 곳을 아시고 어루만지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거지만 신전의식이 없는 이는 예배를 드리는 내내 사람의 말로 듣고 사람의 움직임만 본다는 거거든요 여기엔 사람들을 판단하는 거 외에는 남는 게 없는 거지요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불러요? ‘우매한 자’랍니다 이들의 상태가 뭐랍니까?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 하더라’는 겁니다. 무엇이 악입니까? 신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듣는 것보다 단지 예배드렸음에 만족하는 거지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뭡니까? 이런 상태의 매번 지속을 말하는 거고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악이라고 생각지를 않더라는 거거든요
선악과 사건 이후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오는데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기 때문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는 거지요 예배는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땅의 소산을 드렸다는 것은 뭡니까? ‘사람이 흘린 땀과 수고는 헛되지 않아 바로 이 땅이 이걸 내게 가르쳐주었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잖아 내가 수고해서 거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는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 나의 수고와 노력에 대해 인정받는 시간이 아니지요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며 나가야만 한다는 거거든요  왜, 죄를 유전해 주는 아담의 자손이니까 그래서 모두가 죄인이니까 롬3:10절에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러므로 아담의 두 아들 역시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가려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어야 할 희생제물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셨잖아요. 창3: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렇다면 가인 역시 하나님이 부모님에게 보여주신 대로 동생 아벨에게서 양의 첫 새끼를 사서 그 기름과 함께 드렸어야 했다는 겁니다. 우리의 직업에서 얻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대로 희생제물을 가지고 믿음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배를 이은자가 누구예요? 창4:25절에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아벨의 신앙을 가진 아담의 다른 씨가 셋인데 이때 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은 응답하심이 있는 것이 예배잖아요 무엇이 악이고 죄입니까? 롬14:23절에 “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형식에 매여 한 시간 예배드림으로 만족이 아닌 믿음으로 신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듣고자 함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이 시간 그 말씀 속에서 내게 말씀하심을 듣고 돌아가는 산예배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을 보시지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이 말씀을 쉬운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조급한 생각으로 무엇을 말하지 마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으니, 너는 말을 적게 하여라.”로 번역하고 있는 거지요 여기 ‘하나님 앞에서’ 히브리어 ‘리프네 하 엘로힘’은 ‘하나님의 면전에서’라는 의미거든요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음을 아는 자들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통제하게 된다는 거고 생각 없이 내 뱉는 경솔한 말을 삼갈 거라는 거지요 그래서 시15:1절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절에 ‘진실을 말하며’ 3절에 ‘허물치 않고 이웃을 비방하지 않으며’ 4절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 지라도 반드시 갚으며’ 하나님 면전에 있는 이들이 어떤 말을 하면서 사는지를 알게 하잖아요.
급한 마음에 말을 내는 경우가 있다면 어떤 경우일까요? 시66:14절에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환난 때 급하니까 서원하는 말을 드리잖아요 그런데 환난이 지나고 나니 맘도 바뀌어서 서원을 이행하려는 욕구가 식어져 자신이 한 말 또한 지키려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위급할 때문만 아니라 감정이 격해졌을 때도 우리는 서원의 말을 하지만 그 서원대로 지켜내지 못하게 되더라는 거지요 예수님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감정에 겨워 아니라는 거지요 다 버릴지라도 자신은 아닐 거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 베드로가 닭이 울었을 때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다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깨닫는 것이 뭡니까? 급한 어려움 앞에서는 함부로 서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감정이 이입되어서 말이 앞서기 보다는 우리의 전체의 삶을 내다보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그분을 소망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거잖아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성령 받기를 기도하던 저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고 저들은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였고 세상은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도 교회의 문제점은 뭘까요? 부지런히 말을 만들어내고 방법을 찾는다는 거고 하나님은요? 방법이 아닌 사람을 찾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히브리어 ‘빳솨마임’ ‘하늘 하나님의 처소’거든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늘 하나님의 처소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와 고백에 신중하고 진실해야 하는 자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4절을 보자구요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긴답니다. 여기 ‘걱정’ 히브리어 ‘이느얀’은 ‘고생’ 또는 ‘노고’라는 의미로 신성한 고생이나 노고 보다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마음고생에서 온 걱정이라는 겁니다. 이러다보니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자꾸만 덧없는 헛된 망상에 젖게 된다는 거지요 또한 걱정 많이 하는 것 못지않게 말이 많게 되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여기 ‘우매자’ 히브리어 ‘케씰’은 ‘바보’ 또는 ‘어리석은 자’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바보나 할 소리 생각 없는 소리 어리석은 소리로 상처를 주고 분위기를 어렵게 만들고 상황을 힘들게 만들게 되더라는 겁니다. 괜히 말해서,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입 꽉 다물고 있을 걸,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바보 같았어라고 말하잖아요. 사람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우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께 집중하여 욕심에서 언제나 벗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서원한 것은 속히 갚으라는 거지요 속히 갚지 않는 그것이 뭡니까?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은 이런 우매한 자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서원은 자발적인 것이지만 그 이후 서원을 갚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5절에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서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약속을 드리는 거지요 하나님은 이런 서원 즉 믿음과 순종을 바라시지요. 사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비극은 없잖아요. 그런데 서원하고는 서원을 갚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 되거든요 그러려면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거지요 왜 그것은 가식으로 진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라는 거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서원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라는 겁니다. 6절을 보시지요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뭡니까? 인간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만 들으신 게 아니지요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도 들은 증인이라는 거고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은 범죄가 된다는 거고 서원이 실수였다고 말하지 말라는 거고 그렇게 말하는 그 소리 때문에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에 대해 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7절에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면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을 거고 경솔한 서원을 하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을 하심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시는 분들이 되시며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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