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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설교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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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5:14~30절 “운명에 사는 사람인가 복음에 사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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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1-08-06 19:24    조회 2,702    댓글 0  
 
마25:14~30절  “운명에 사는 사람인가 복음에 사는 사람인가”  2012.8.8.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인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종류가 적어도 육백마흔네 가지나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거고 그 다음이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세 번째 두려움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랍니다. 그런데 이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두 부류인데 하나는 죽은 사람이고 또 하나는 정신이상자라는 거지요 오죽하면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가 삼백서른여섯 번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삼백육십오일 두려움을 매일 물리쳐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만큼은 두려워해야 한다는 건데 그날 주님의 재림의 날 예수가 없는 삶을 인간 모두는 두려워해야 한다는 거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4~15절을 볼까요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여기 주인이 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다는 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자기 종들에게 맡겼다는 건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맡긴 하나님의 소유는 뭐가 있을까? 출19: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①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거고, 큰 범위에서 시24:1절에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뭡니까? ②세상과 만물 그리고 모든 인간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라는 거지요 그리고 고전6: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③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구원 받은 이들을 값으로 산 하나님의 소유라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만물과 인간이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인간 중에서 값을 주고 산 특별한 소유가 있는데 우리 믿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고요.
①‘값없이 받은 구원으로 인한 은혜의 일’입니다. 고후8:19절이지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뭡니까? 예배와 선교를 통한 영광과 구제를 통한 영광이고 이것이 믿는 자의 소원이라는 건데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이 맡은 일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또 우리가 맡은 주의 일이란 ②능하게 하신 주가 맡기신 ‘직분’이라는 거지요 딤전1: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그러니까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두 가지 값없이 받은 구원에 대한 선교와 구제 그리고 예배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주가 맡기신 직분이라는 거지요 
오늘 본문의 자신의 소유를 맡기는 주인의 기대가 뭘까요? 재산의 증식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과 직분을 맡기신 우리 주님의 기대도 오직 하나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풍성해지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은 이런 기대를 하면서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주인이 자신의 소유를 맡기실 때 기준이 뭐라고 하시나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재능대로’랍니다. 여기 ‘그 재능’ 헬라어 ‘(그)이디안 (재능)뒤나민’은 ‘그 능력대로’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똑같이 일률적으로 맡기지 않고 자신의 그릇 만큼 어떤 종은 다섯 달란트, 또 다른 종은 두 달란트, 그리고 또 다른 종에겐 한 달란트 이렇게 각각 다르게 주인이 맡긴 거지요 이것은 우리 예수님도 같지요 롬12:6절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또 엡4:7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뭡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각각의 재능, 능력대로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풍성하게 하라고 맡기셨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16~17절을 보시지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원문에서는 ‘바로’ 헬라어 ‘유데오스’가 주인이 떠났다는 15절 끝에 있다는 건데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16절에 ‘바로’가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사용되었다고 보고 해석을 했고 우리 개역개정성경도 영어성경번역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바로’ ‘유데오스’가 15절이 아닌 16절에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곧 바로 간 것으로 해석 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원문대로 한다면 15절 끝에 ‘주고 바로 떠났더니’가 되어 주인이 바로 떠난 것처럼 예수님 역시 바로 승천해 떠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16절에서 금 다섯 달란트 맡은 자는 그냥 ‘가서’가 된다는 겁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는 가서 장사하여 모두 각각 갑절로 남겼다는 거거든요 우리 믿는 자도 우리가 맡은 구원의 복음과 직분에 갑절로 남기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가 있는데 ①기도하는 자의 태도지요 엡6:18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②즉시 순종하는 자의 태도지요 삼상15: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③믿음 있는 자의 태도입니다. 딤후4:7절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 다음 태도가 ④충성스런 자의 태도지요 고전4: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리고 맡은 자의 마지막 태도가 ⑤본이 되는 자의 태도라는 겁니다. 벧전5:3절에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이런 태도로 산 사람들이 20절이지요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또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이런 배나 남긴 삶에 대해 주인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21절과 23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뭡니까? 주인이 매우 흡족해 하더라는 거잖아요. 우리 주님이 이렇게 우릴 보고 그날 흡족해 하실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절에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여기 ‘가서’ 헬라어 ‘아펠돈’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떠나버리다’인데 16절에 ‘가서’ 헬라어 ‘포류데이스’는 ‘출발하다’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와는 다르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주인에게 등지고 떠나버린 사람이라는 거고 곧 서운한 마음을 가져서 맡기고 떠나신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 버린 사람이라는 거 아닙니까?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비교에서 오는 이탈행위라는 거거든요 저들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각각 맡았는데 나는 왜 한 달란트냐는 거거든요 이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그래서 주인에 대한 섭섭함으로 인해 한 달란트를 유지하기 보다는 그 한 달란트마저 땅에 묻어서 상실했다는 거지요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변명을 들어볼까요? 24~25절에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결산의 날이 누구에게나 온다는 거지요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종도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자들처럼 결산의 날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그가 주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뭘까요? 당신은 ‘굳은 사람’이랍니다. 여기 ‘굳은’ 헬라어 ‘스클레로스’는 ‘뻣뻣한’ ‘거친’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강퍅하고 완강하며 가혹하고 냉정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뭡니까? ‘내 팔자를 요 모양으로 정해 세상에 태어나게 한 하늘에 대한 가혹하다는 평가’입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러잖아요.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을 포기하고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는 것에 원망과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포기의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하늘의 주인이 가혹하고 냉정하다고 말한 겁니다.
그래서 저들의 주인이자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저들의 평가가 뭡니까? 키질을 하므로 알곡을 모으는데 키질 없이, 헤치지 않고도 모은다는 잘못된 경제법칙과 심지 않았는데 거둔다는 불가한 자연법칙을 말하지요 그렇다면 달란트를 땅에 묻은 이유가 뭐라는 겁니까? 불로소득 그리고 요행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 ‘두려워하여’ 주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에서 오는 두려움이라는 거지요 실제로 하나님은 기대 이상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신 데도 인간 스스로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생각조차 갖지 못하고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우리들에게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묻어 두었던 달란트를 꺼내서 다시 주인에게 돌리면서 손해 보지 않았으니 너무 다그치지 마시오라는 식으로 나오는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을 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일을 해서 남기는 것인데 주인의 마음 하고는 상관없이 자신의 무책임을 정당화하고 있는 거지요 이에 대해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다섯 달란트로 열 달란트 만든 자에게 주라고 하시잖아요. 29절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나님이 부익부 빈익빈을 조장하시는 분인가요? 아니지요 오히려 일반적인 영적인 원리를 말씀하신다는 거거든요 뭡니까? 예수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예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생명의 말씀이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생명의 말씀이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그렇다면 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실제로는 말씀이 있었지만 말씀을 담고 살지 못했고 예수가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거 아닙니까? 예수가 있다면 그 말씀대로 산다는 거잖아요 30절이 결말이지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팔자를 탓하며 운명에 살아 멸망 받을 자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사는 이 되어 주님 예수 다시 오실 때 이왕이면 다시 오시는 주님이 칭찬하시고 흡족해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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