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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2:16~17; 3:1~2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시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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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0-11-27 10:50    조회 5,566    댓글 0  
 
살후2:16~17; 3:1~2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시는 아버지” 20.11.29
16절을 보시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바울사도가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기를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시는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위로’랍니다. 헬라어 ‘파라클레신 아이오니안’은 ‘시간적 영원성과 더불어 불변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위로거든요 고후1:3절에선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는 영원한 위로만이 아니라 뭡니까? ‘모든 위로’랍니다. 헬라어 ‘파세스 파라클레세오스’는 당신의 백성들이 겪는 모든 것을 감싸주실 수 있는 넉넉한 위로를 말하거든요 그리고 본문에 좋은 소망을 주신다는 거잖아요. ‘좋은 소망’ 헬라어 ‘엘피다 아가덴’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선한 소망’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이렇듯 좋은 소망과 영원하고 모든 위로를 주심이 우리의 자격이나 됨됨이가 괜찮아서 주시는 게 아니라 은혜로 주셨다는 거 아닙니까? 보육원에서 자란 남매가 장성해서 아버지를 만났지만 화상으로 일그러진 모습에 질색을 하고 다시는 찾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남매는 마지못해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남매는 장례식장에서 화장하지 말아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화장을 마친 다음 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시던 물건들을 태우다가 우연히 한 권의 일기장을 발견했다는 거지요 그 일기장에 아버지가 화재 때 남매를 구출한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불속으로 뛰어들어 어린 남매를 구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내는 잃고 말았다는 내용이었고 또 이런 내용도 있었는데 “보고 싶은 내 아이들아 미안하구나.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내가 죽거든 절대 화장은 하지 말아다오. 난 불이 싫단다. 불에 타는 무서운 꿈에 시달리며 30년을 넘게 살았구나.” 일기를 읽고 난 두 남매는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한 줌의 재가 된 뒤였습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부모는 먼저 사랑이요 잘해서가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이고 이것을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라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은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까지 우리에게 주심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라는 거고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라고 기도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7절을 볼까요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 ‘위로하시고’ 헬라어 ‘파라칼레사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뭘 위로 하세요 우리의 ‘마음’이라는 거지요 ‘마음’이 헬라어 ‘카르디아’인데 원문엔 ‘카르디아스’ 마음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했거든요 그러니까 성도들 개개인의 마음 마음을 위로 하신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거지요 여기 ‘굳건하게’ 헬라어 ‘스테 릭사이’는 ‘흔들리지 않도록 확고하게’라는 의미거든요 그 당시 데살로니가교회 밖에서는 온갖 목숨을 요하는 무서운 핍박이 행해지고 있었으며 교회 안에서는 순교하여 죽은 자들로 인해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이미 재림이 이루어졌다는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미혹으로부터 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하나님의 ‘스테릭사이’ 굳건하게 하심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거지요 이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우리 한국교회에선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주는 것를 중보기도라는 표현 보다 ‘도고’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거지요 도고는 영문으로 intercession(인터세션) prayer(프레얼)인데 그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하는 기도, 남을 위한 중개하는 기도를 말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도고’ intercession(인터세션) prayer(프레얼)은 예수님의 대속을 힘입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갈라진 틈에 서서 그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중재하는 또는 중개하는 기도를 의미한다는 거거든요
실제로 성경에 이 ‘도고’라는 명칭이 있잖습니까? 딤전2:1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간구가 있고 기도가 있고 분명 ‘도고’가 있지요 ‘도고’는 헬라어 ‘엔툭세이스’의 원형은 ‘엔툭시스’이고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intercession prayer (인터세션 플레얼)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중보기도’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가로막힌 죄의 담을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로 헐어버리신 예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대신 간구해 주시는 기도를 가리킨다는 거지요 딤전2: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여기 ‘중보’ 헬라어 ‘메시테스’ 는 영어로 ‘mediator’(미디에럴)인데 따라서 ‘중보기도’는 영어 ‘mediator prayer’(미디에럴 프레얼)은 오직 한 분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에게만 사용되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중보기도는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요17:9절에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뭡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우리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기도하셨다는 거잖아요. 또 히7:25절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뭡니까? 예수님이 천국에 가셔서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는 거니까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 오직 한 분 중보자로서 (미디에럴 프레얼) 중보기도를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후3:1절을 볼까요.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인터세션 프레얼 도고한 바울사도가 이번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과 또 자신과 함께 하는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요 이것이 뭐예요? 인터세션 프레얼 ‘도고’라는 거지요 우리가 여기서 우리를 돌아 볼 수 있는 것은 도고를 부탁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가진 이들이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가하는 거고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도하는 이로 여겨 친밀하다고 생각해서 도고를 부탁해 오는가하는 거지요 
바울이 도고를 부탁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주의 말씀이 퍼져 나가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한 겁니다. 여기 ‘영광스럽게 되고’ 헬라어 ‘독사제타이’는 ‘영광스럽게 되도록 계속해서 달음질하라’는 의미거든요 사람이 다 똑같지 않듯이 기도역시 다 같은 기도가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바울의 기도 요청은 복음이 퍼져나가 영혼 구원이 이루어져 영광스럽게 되도록 인터세션 프레얼 도고를 요청하고 있는 거지요 우리도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와 민족과 세계를 향해’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52:2~3절에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우리교회가 파송한 신요한 박소연선교사가정과 페이는 작지만 일본으로 김송 정은미선교사 가정 그리고 우리교회 성도들의 손으로 세운 필리핀 아글라오선유중앙교회 불가리아 밧딱선유중앙교회 아프리카 탄자니아 미케세플웨 선유중앙교회 그리고 다수의 협력선교사들을 지원하되 기도로 물질로 힘을 합쳐서 하고 있는 것은 우리교회가 오늘 말씀처럼 영광스럽게 되고 있음인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나무는 죽는 순간까지 해를 바라보며 오직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이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우듬지’라는 거지요 우듬지란 나무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줄기를 말하는데 곧게 자라는 침엽수의 경우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자라면서 아래 가지들이 제멋대로 자라는 것을 통제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무 맨 위의 우듬지 끝이 한 마디쯤 자라고 나면 그제서야 아래 가지도 뒤 따라서 한 마디 쯤 자란다는 거지요
나무에 우둠지가 있다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영적 우듬지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자신의 삶과 사명을 지탱하게 해주는 맨 위에 <영적 우듬지>가 있어서 태양과 같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저 천국을 향해 계속 뻗어나가게 되는 거고 그러므로 비바람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잎을 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들처럼 우리 역시도 온갖 아픔과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곧게, 곧게 위로, 위로 성장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우듬지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이 가진 영적 우둠지는 세상을 향하는 우둠지가 아니고 하늘의 소망을 가진 영적 우둠지이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다 극복할 수 있잖아요 영적 우둠지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성경이 말하고 있지요 고후4장 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 우둠지는 뭘 말하는 걸까요? 많은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살리시고 새롭고 산 길로 나아가신 우듬지로서의 예수님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우둠지 밑에 자라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보잖아요. 천국을 사모하여 위로 또 위로 곧게 또 곧게 성장하는 거 아닙니까? 우둠지 같으신 예수를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다보면 우리 행할 길 환해지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2절을 볼까요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바울사도가 두 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인터세션 프레얼 도고를 부탁하는 그 내용이 뭡니까? ‘건지시옵소서.’잖아요. 헬라어 ‘뤼스도멘’은 ‘위험으로부터의 구조’를 의미한다는 거지요 누구로부터 건져 달라는 겁니까?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이라는 거거든요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 헬라어 ‘아토폰 카이 포네-론 안드로폰’은 ‘정당하지 못한 또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차지한 나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이들에게서 건져주시도록 도고의 기도를 부탁하는 거지요. 이는 시편기자의 기도를 의지한 까닭이지요 시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수님도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끝 부분에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러면서 바울사도가 뭘 말합니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말하잖아요. 우리 개역개정성경에서 그냥 지나치고 있는 단어가 헬라어 ‘가르’ 접속사지요 왜냐하면 이라는 말이거든요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가르’ ‘왜냐햐면’ 이 악한 사람들은 믿음이 있다하지만 바울과 그의 전도자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뭐라는 겁니까? 사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님 눅18:8절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므로 고전13:5절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미디에럴 프레얼 중보기도하시며영적 우둠지가 되시는 예수로 인해 세상의 악한 것들과 환난과 아픔과 문제들을 이기며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하늘을 소망삼고 곧게 그리고 위로 쑥쑥 성장하시고 이웃을 위해 인터세션 프레얼 도고를 힘써 하시는 우리 교회를 넘어 세계를 복음으로 품는 영광스럽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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