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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8:1~2절 “주여 인간적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주의 은총을 기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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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0-11-20 15:07    조회 4,466    댓글 0  
 
창18:1~2절  “주여 인간적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주의 은총을 기억하게” 20.11.22
한 해를 마감하는 때를 얼마두지 않은 시점에서 마무리를 잘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1절과 2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은 오전에 일을 마치고 날이 뜨거워지자 노근 해진 몸으로 인해 장막 문에 기대어 졸며 쉬고 있는 중인데 맞은편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고 눈을 들어보니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는 거지요 아브라함은 곧장 그들에게 달려가 집안으로 영접해 들였다는 겁니다.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여호와 자신과 다른 두 사람 역시 보이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천사였을 거라는 해석이 신학적 입장이지요. 그리고 그 당시 고대 근동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으로 가만히 서 있는 자세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발견하고는 그 나그네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달려 나갔다’는 말이 지금 시대에서는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라는 거 아닙니까? 초대받은 아주 귀한 손님이라면 당연히 달려 나가야지요 그러나 요즘 시대적 상식으로는 알지도 못하는 나그네를 접대하려고 달려 나가지는 않는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달려 나가’ 히브리어 ‘루츠’는 ‘돌진하다’니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 나가서 영접했다는 거지요 우린 아브라함이 보여준 주인과 나그네의 아름답고 훈훈한 관계를 보면서 지난 18일 인터넷뉴스와 비교하게 되네요 동영상이나 사진 등을 공유하는 엡을 말하는 인스타그램에서 모 여배우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지요. 전남 영광의 모 아파트 대표와 입주민들이 택배기사 부부가 승강기를 오래 잡아둔다는 이유로 사용금지를 했다는 소식에 대해 ‘인간의 관계는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살아가는 관계가 아닌가 택백기사님이 없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 것인데 이젠 이런 몰상식한 행동은 그만하면 좋겠다’는 입장 문이었는데 이 여배우의 입장에 찬성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더라구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이 돌진하다시피 해서 나그네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낯설게 볼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몸을 땅에 굽혔다’는 겁니다. 이는 그 당시 최대한의 예를 갖춘 인사양식이었다는 거지요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날 때 창33:3절에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또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 총리로 있으면서 아버지 야곱을 초청하여 만날 때 창48:12절에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그리고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를 영접할 때 왕하2:15절에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경배까지는 안 되지만 땅에 엎드리는 인사가 그 옛날 고대 근동에서 예를 갖추고 행하던 인사였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지요 이같은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 영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깨달았을 말을 유대인들의 지혜서지요 탈무드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천사를 맞이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라고 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히13: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정에 주릴 수밖에 없는 오늘날 아브라함의 정에 찬 모습에서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대하여 하는지를 충분히 고민하게 하잖습니까? 

다시 1절을 보시지요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을 방문한 나그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여호와시라는 걸 밝히고 있잖습니까?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로 그리스도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말할 때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사람의 모습으로 방문하신 여호와를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지요 장막 문에 쉬고 있는 아브라함은 전혀 예상치 않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 맞은편에 서 계셨다는 거고 아브라함은 그때 까지만 해도 하나님이신 줄 모르고 그냥 길 떠나는 나그네인줄만 일고 지극 정성으로 대접을 하였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런 모습이 특별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는 거거든요
이런 모습에 대한 보상을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말씀하잖아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그때 많은 민족들이 그 보좌 앞에 서게 되고 그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는데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시더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오른 편 양무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뭐였습니까?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는 거였지요 예수님이 그 이유를 말씀하지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여기 나오지요 나그네로 있을 때 영접했답니다.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 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무리들인 의인들이지요 예수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래서 이런 일을 한 일이 없는데 어째 우리가 그리 했다고 하십니까? 그러니까 보좌 앉으신 임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25:40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쉽게 지나치거나 외면해도 무방할 일상생활에서 예수 믿고 의로운 자가 된 우리가 할 일이 참 많구나하는 걸 깨닫잖아요 저는 어느 날 사회복지위원회에서 하고자 하는 가정도우미, 노인행정도우미, 긴급운전도우미로 연세 있고 힘이 없어진 우리 성도들에게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이 섬김이 얼마나 신선하던지 우리 일상생활에서 나만 부지런하면 돈들지 않아도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이것이 아브라함이 생각하지도 못한 하나님을 대접한 바로 그 일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보좌에 앉으신 임금 예수님의 말씀에서 어려워서 못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지 않습니까? 이 일들이 성육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라니 1182년 이태리 아시스에서 부자 상인 피에톨 띠 벨라드와 경건한 신앙의 여인 마돈나 피카의 아들 성프란시스가 태어납니다. 훗날 성프란시스는 자신의 수도원에 자신이 없는 사이에 산속에 살고 있는 거지 떼들이 찾아왔을 때 수도사들이 그 거지 떼들을 쫓아버렸다는 보고를 받게 됩니다. 그들도 내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아니냐 어찌 빈손으로 돌려보냈다는 말이냐 책망하고는 먹을거리를 준비해서 수도사들을 산속 거지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보내 정중히 사과하고 돌아오도록 심부름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거지 떼들이 성프란시스를 찾아와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산 속의 거지동네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났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선행을 보면서 믿음의 조상만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이는 이렇게 사는 거야 선행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시점 지금이 바로 신앙으로 믿음으로 준비할 때이고 아브라함처럼 이웃을 향해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고 그리고 나그네를 영접하자는 거지요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나그네의 모습으로 사람의 모습을 하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일이 지금도 계속되는 까닭인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성도들이 크게는 아니지만 십시일반 일 년 가까이 해온 이 한 해 사랑실천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었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가 자부심을 갖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 나그네는 대접을 받는 입장에서만 있었는데 여기서 벗어나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9절을 보시지요.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나그네가 주인에게 물을 말은 아니지요 남의 아내가 어디 있는지 그것이 나그네들이 관심 둘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질문을 통해서 이들이 보통 나그네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이름을 알고 찾는 이 나그네들 중에 누가 계셨습니까? 성육신 하신 여호와가 계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보시지요 10절에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여기 ‘네게로 돌아오리니’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거지요 왜 이렇게 강조하시나요? 믿음 없는 인간에게 확신을 더 해주시려는 거지요 왜냐하면 11절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전혀 가망성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때 하나님이 반드시 돌아올 거고 그때 아들을 낳게 될 거라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갈릴리 사람들을 향한 천사들의 외침이 뭡니까? 행1:11절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 오랜 세월 이젠 포기하여야 될 때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때 하나님이 오셨고 그 다음 해 아들 이삭을 낳고 젖을 먹였던 사라처럼 우리가 지금 그렇잖아요. 말세가 예수님 오신 때부터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세이고 여호와가 다시 오시겠다는 실현이 세상에서 이젠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때 바로 이 때가 우리 주님 예수께서 가셨을 때 모습 그대로 다시 재림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거라는 수태 고지한 때가 아브라함은 구십구 세가 되고 사라는 팔십 구세의 나이였었다는 거잖아요 나이에서만이 아니라 사라는 창11:30절에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또 11절에 생리가 끊어졌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거야 라고 하시는 여호와의 말을 들을 때 12절에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사라만 웃은 것이 아니지요 창17:17절에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는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식 대로 이해한 결과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식이 아니라 하나님 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받는 것이어야 되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이 같은 축복의 선언을 들을 때 뭘 생각했나요? ‘나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내가 낳는다’고 생각했다는 거지요 아니지요 사라가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뭡니까? 내년 이 맘 때 내가 반드시 올 것인데 그 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뭡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사라에게 주신다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난 못해도 하나님이 주시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물학적 임신만을 생각했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임신도 있는데 말이지요. 인간의 절망을 하나님의 불가능으로 연결하는 고리를 오늘 부로 잘라내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눈과 생각 그리고 이성적 방법과 수단에서 절대로 안 되는 일일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은총을 내려 주시면 되는 줄 믿는 이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약1:17절을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큰 소리로 읽어볼까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나를 보지 마세요 환경도 보지 마세요 문제에 실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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