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    |    |  
회원 로그인
회원 가입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가입으로 서비스 약관개인정보 보호 정책 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SUNYOU CENTERAL CHURCH
주일오전 설교원고

bo_title_img1.png

막7:24~30절 “막연이 아닌 목적이 있는 삶”  
카카오톡 카카오 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밴드 주소복사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3-03-02 00:00    조회 5,538    댓글 0  
 
마가복음7:24~30절     “막연이 아닌 목적이 있는 삶”    2013. 3. 3
수로보니게 족속은 지금의 시리아사람을 말합니다. 시리아에서 시집을 왔는지 아니면 조상이 지금의 두로로 이주를 해서 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여인에겐 아주 큰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딸이 귀신들린 것입니다. 딸을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었을 겁니다. 앉으나 서나 집에서나 밖에서나 뭘 하고 있어도 뭔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오직 하나 딸을 고쳐보려는 것이 엄마인 이 여인의 전부였을 겁니다.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렸을 것이고 예수님이 명령하시니 귀신들이 떠나고 사람들이 온전해지더라 이런 소식에 아마 귀가 버쩍 띄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여인의 눈과 귀는 예수님에 대한 것에 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기가 살고 있는 두로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거 아닙니까? 그 소식 듣고 가만히 있을 엄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이 두로에 오신 목적이 아무도 모르게 쉬고 싶으셔서 오신 것이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아무도 모르게 움직이셨지만 온통 예수님 한 분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이 여인을 모르게 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본문에선 숨길 수가 없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 몰래 들어가신 집을 이 여인은 알아냈고 결국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간구합니다. “예수님 내 어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세요.” 이 간구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 아직 자녀들인 이스라엘백성들이 배불리지를 못했는데 자녀가 먹어야할 떡을 어찌 개에게 던지겠느냐”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삶이 막연히 움직이시는 삶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삶이다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이스라엘백성인 자신의 자녀들이 먹어야 하는 떡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벳세다 들녘에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보리 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고 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건 뒤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예수님에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늘의 떡을 먹는 표적을 보았는데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이 뭐냐고 떡을 날마다 줄 수 있겠느냐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하늘의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주신 것이고 이제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참 떡을 내려주신다 그러면서 요6:33절에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렇다면 생명을 주는 이 떡을 날마다 달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생명의 떡에 대해서 그 실체를 말씀하십니다.
요6: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지금 자녀에게 충분하게 먹여야 하는 떡은 무슨 떡이라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처한 영적상태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영적으로 죽었다. 그래서 예수 생명의 떡을 먹고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생명의 떡을 먹고 어서 속히 살아야 할 자녀인 이스라엘백성들이 생명의 떡을 먹는 일에 너무나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요7: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이 말씀에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지경으로 다니지 못하고 그저 갈릴리에서 다니시는 이유가 예수님을 자녀들인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까닭이었다는 겁니다. 자기 자녀들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도 지금 두로의 이 현장에서 예수님은 누굴 생각하고 계십니까?
자녀인 이스라엘백성들이었습니다. 저들이 생명의 떡을 충분히 먹어야하는데 하는 자녀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구주 예수님이신데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것을 피해서 숨듯이 두로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기준에 못 미치고 어느 땐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을 박는 일을 하며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경우도 있음에도 여전히 예수님은 자기 백성인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대한 관심으로 가득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여인에게선 무엇을 봅니까? 여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막연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목적이 있는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 되도 별수 없고 도 아니면 모 이런 식입니까? 아닙니다. 어린 딸에게서 반드시 귀신이 쫓겨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바로 그 면을 보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 졸지에 개로 몰렸습니다. 이 여인의 출신성분이 26절에 헬라인 즉 그리스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헬라문화가 왕성한 시대에서 헬라인의 자긍심이라는 것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동로마의 대부분은 그리스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런 헬라여인이 졸지에 약소민족의 한 사람인 예수님께로부터 개라는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존심 하나로 버텼다는 말도 합니다. 그 자존심이 크게 손상되는 것은 참으로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딸이 온전해지는 목적을 위해선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여인은 자신을 개로 수용하고 있습니 다. “옳습니다만 상아래 개들이 뭐먹고 삽니까? 집 주인의 자녀들이 먹다가 흘리는 부스러기가 아닙니까?”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 자존심의 상처 같은 고통들이 수반됩니다. 때론 바닥까지 내려가는 고통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란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마치 연료와 같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이루기 위하여 찾아온 에너지와 같은 것이 고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혹자는 고통은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딸에게 귀신이 나가고 생명의 떡을 먹고 생명 얻기를 목적하는 여인에게 이런 고통은 문제가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과정이 만만치 않습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하는 큰 심적 고통이 뒤 따릅니다. 바닥까지 추락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비웃음도 들리는 듯싶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순간을 만날 때마다 더 빨리 달리라고 연료가 강하게 타고 있구나 곧 새로운 변화를 주시기 위해서 내게 고통이라는 에너지를 주시는구나 고통이 심하여 지면 기억하세요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하나님이 확성기에 소리치시는구나
그러나 우리들은 더 큰 위대한 목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겁게 하여 드리는 것이 목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인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주님의 거절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에게만 소망이 있음을 알고 주님만 바라보는 가까이 하려는 모습을 배웁니다. 시27:4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현실 속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또 시63: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그래서 다윗이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 같아요 또 하나님이 다윗을 그렇게 내 마음에 합하다 하셨나 봐요.
야곱은 어떻습니까? 베푸실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며 밤이 새도록 모래 위에서 하나님만을 목적으로 씨름을 하였고 하나님은 당신을 상대로 건방지게 씨름을 했다고 책망치 않으시고 오히려 네가 이겼다 하시면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약4:8절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가 하는 만큼 하나님과의 거리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복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가까이해서 얻은 복이 무엇입니까?
29절입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여인은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딸이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집안도 침상에 누워 있는 딸아이도 그대로인데 달라진 것은 예수님 말씀처럼 딸에게서 귀신 떠나간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집도 우리의 모습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우리 자신이 달라졌습니다.
엡2:1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 이전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에게 예수 믿기 전에 역사하던 영이 사단의 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지배를 받으니 세상풍조를 따르고 마귀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귀신이 떠나고 악한 영이 떠났습니다. 반대로 이것은 무슨 증거 생명의 주님이 내 안에 오신 증거입니다.
침상에 누운 아이가 불안하지 않고 평안한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고 예쁨이 돌아온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귀신이 떠났으니 악한 영이 떠났으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주님을 가까이 하면서 주님만 목적하며 살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렘29:11~13절 말씀처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그분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평안이요 미래가 있는 것이요 그러므로 그분이 끊임없이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온 맘으로 찾으면 만나주시고 아멘입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일오전 설교동영상
24년 4월 28일 주일 예배 영상
고린도후서 4:7~15 김용우 목사
2024년 4월 28일
교회앨범
봄맞이 교회 대청소 및 새단장 
동영상앨범
22년 낙도선교회
- -
-
선유중앙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회원가입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전체 최근게시글
  • 선유중앙교회 SNS를 방문해 보세요
    교회명 : 선유중앙교회 | 담임목사 : 김진수 | 주소 : 10811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독서울 5길 18-30
    교회전화 : 031-954-1080, 953-5977 | Fax : 031-954 1040 | 목사관 : 031-952-2097 | 이메일 주소 : yegrim@hanmail.net
    Copyright ©1955~2024   sunyou.or.kr. All Rights Reserved.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031-954-1080
    선유중앙교회 전화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