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    |    |  
회원 로그인
회원 가입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가입으로 서비스 약관개인정보 보호 정책 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SUNYOU CENTERAL CHURCH
주일오전 설교원고

bo_title_img1.png

마17:14~20절 “마귀의 산에서 하나님의 산으로 옮기는 믿음을 자녀에게”  
카카오톡 카카오 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밴드 주소복사
   김진수   작성일 22-04-28 22:16    조회 1,752    댓글 0  
 
마17:14~20절 “마귀의 산에서 하나님의 산으로 옮기는 믿음을 자녀에게” 2022.5.1.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는 히브리어로 ‘옐레드’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소년, 또는 자식이거든요 또 하나의 어린이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아빌’인데 ‘옐레드’보다는 좀더 어린아이를 뜻한다는 거지요 이보다 더 어린 아이를 히브리어 ‘올렐’이라고 부르는데 ‘젖먹이’를 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헬라어 ‘네에피오스’는 ‘어린아이’ 또는 ‘아이’를 뜻하고 또 다른 헬라어 ‘파이디온’ 역시 ‘아기’, 또는 ‘어린아이’라는 의미이고 또 다른 헬라어 ‘테크논’은 ‘자식’ 또는 ‘소자’ 또는 ‘아이’니까 우리말도 갖난아이, 어린아이, 어린이 등 나이별로 다르게 부르는 것과 같은 거지요

14절을 보실까요.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 오셔서 무리에게 이르렀다는 거지요 눅9:37절에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 새”라고 변화산에서 하루 동안 계셨었구나 알게 됩니다. 자 예수님이 산 밑에 무리들에게 내려오셨을 때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헬라어 <고뉘페톤>은 <고뉘>가 <무릎>이고 <페톤>은 <떨어지다>니까 무릎을 꿇었다는 거지요 뭡니까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자세를 취한 거라는 겁니다. 15절을 보시지요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 지는지라” 여기 <불쌍히 여기소서> 헬라어 <엘레에손>은 <긍휼히 여기셔서 문제를 해결해주세요>라는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아버지가 예수님께 치료 받아야 할 대상을 누구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까? 아들이라는 거지요 아들이 어떤 상태라는 겁니까? 여기 <간질> 헬라어 <셀레니아제타이>에서 <셀레니>가 <달>이거든요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간질에 대해 생각하기를 <달에 의해 침범 되는 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로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것이 달의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생기는 질병이라고 여겼다는 거거든요
그러나 현대의학에서는 <간질>은 <발작적으로 경련하며 의식상실을 일으키는 뇌질환>이라고 규명하고 있다는 거지요 여기 <고생하여> 헬라어 <파스케이>는 <괴로움을 겪다> 또는 <상하다> 또는 <해를 받다>는 의미니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고통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주 피폐해져간다는 겁니다. 마가와 누가는 이 일에 대해 더욱 더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먼저 막9:18절에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그리고 눅9:39절에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아들의 이런 상태를 바라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차라리 내가, 그렇지만 대신 해 줄 수 없는 부모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이런 가슴 찢어지는 아픈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자식을 이끌고 주님께 맡기려고 무릎을 꿇고 엎드린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 모든 부모들이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본문에서는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게 하는데 자주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질병을 귀신에 의한 것으로 봤다는 겁니다. 그래서 막9:22절에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지금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권능의 주님이란 사실을 듣고 자식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왔음을 보면서 우리 또한 우리의 자녀들이 체험적 신앙인으로 이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절을 볼까요.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간질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먼저 경험한 것이 무엇인가요? 산 밑에 예수님의 다른 아홉의 제자에게서 경험한 것을 말하지요 ‘그들이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이미 뭘 경험했습니까? 마10:1절이지요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전에 되었는데 지금은 안 되는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신유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시는 것으로 믿음 여하에 따라 일어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지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성전 미문에 앉았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정한 기도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다가 이 사람을 본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 앉은뱅이는 일어났고 걸었고 너무도 기뻐서 뛰었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거거든요 그때 베드로는 모인 무리들에게 이 사람이 일어난 일에 대해 행3: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생기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완전히 낫게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을 때는 어떤가요? 마13:58절에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시지요 마6: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지 않으시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까?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하시잖아요.
17절을 보자구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여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랍니다. <믿음이 있다> 헬라어 <피스토스>거든요 그런데 부정사 <아>가 붙어서 <아 피스토스> <믿음이 없다>가 된 거지요 그러니까 <믿음이 적은> 헬라어 <올리고피스토스>와는 완전 구별되는 거니까 <아피스토스>는 믿음이 전혀 없는 불신앙을 가리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패역한 세대랍니다. 여기 <패역한> 헬라어 <디에스트람메네>는 <얼굴을 돌려대다> 또는 <몸을 돌이키다>니까 하나님에게서 얼굴을 돌이키고 몸을 돌이켜 떠나 바른 것을 굽게 한 모습이요 악한 것에 미혹당하여 하나님을 거스리는 행위를 말한다는 거거든요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것과 패역한 것은 참으로 닮은꼴인 거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이적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는 누굴 말하는 걸까요? 막9:14절에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서기관들이랍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해 마23:2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예수님의 말씀인즉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라면 지도자들이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 3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말은 듣고 행하여 지키되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저들의 행위는 닮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저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돌아갈 것이 13절이지요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바로 이들이 패역한 이들이 믿음이 없는 이들이었다는 거고 이들의 말을 듣고 따르는 무리들이 패역했으며 믿음이 없었고 오늘 본문의 아들의 아버지가 바로 패역하였고 믿음이 없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절대로 제자들이 이 속에 들지 않은 것은 뭡니까? 제자들의 믿음은 헬라어에서 나타내 주잖아요. 믿음이 없다는 <아 피스토스>가 아니지요 믿음이 적다는 <올리고피스토스>였다는 거지요 예수님은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그리스도의 기적과 치유를 보고 들었으면서도 귀를 닫고 눈을 감고 곧은 목을 해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에 대한 탄식이라는 거지요 아이의 아버지에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뭡니까? 믿음이었잖아요. 지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가 상실 되어서거든요 지금 자녀를 데리고 귀신과의 관계를 끊어내고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영의 눈이 뜨여지기를 원합니다. 고후4:4절에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마귀가 혼미하게 해서 예수 복음을 받지 못하게 해서 죄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지 못하게 하더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어떻든지 부모는 오늘 본문의 아비처럼 예수그리스도와 우리의 자식들이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일을 최우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절을 보시자구요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미국의 개척 시대를 살았던 설교자제임스는 어느 날 길 잃은 개 한 마리를 집에 데리고 왔는데 두 아들이 그 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거지요 그 검은 개는 꼬리 부분에 하얀 털 세 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문에서 잃어버린 개를 찾는 광고를 보았는데 설교자제임스가 볼 때 영락없는 자신이 길에서 데리고 온 바로 그 개였던 거지요 설교자제임스는 두 아들의 도움을 받아 세 개의 하얀 털을 조심스럽게 뽑아냈습니다. 한편 비슷한 개가 제임스의 농장에 있다는 말을 들은 개 주인이 찾아왔을 때 개는 주인을 보자 꼬리를 치며 반가워했고 개 주인은 개를 데려가려고 했을 때 제임스는 “아니 당신의 개의 꼬리에는 하얀 털이 세 개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개주인은 자신의 개가 분명했지만 하얀 털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냥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요 훗날 설교자제임스는 “나는 개는 가질 수 있었으나 두 아들을 잃고 말았다.”고 후회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두 아들 프랑크 제임스와 제이시 제임스는 당시 개척시대의 악명 높은 유명한 악당들이었다는 겁니다. 믿음 따로 생활 따로 기도 따로 삶 따로 사는 신앙은 나도 망하고 자식도 망한다는 것을 기억하자구요
여기 아이를 데려오라 하시니 말씀에 순종하잖아요. 그렇습니다. 말씀에 철저한 순종의 시작이 주의 기적을 가져온다는 것을 자식을 이끌고 온 아버지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음을 깨닫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 <꾸짖으시니> 헬라어 <에페티메센>은 <질책하다>는 의미거든요 질책을 누구에게 하는 겁니까? 자신보다 높은 이에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낮은 존재에게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만물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다는 거고 귀신도 마찬가지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지요 귀신이 나가니까 아이는 간질에서 나았다는 거 아닙니까? 간질이 낫는 다이나믹한 과정을 막9:26~27절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그리고 본문에 19절에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의 이 질문에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또 하나의 이유를 마9:29절에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할 수 있는 두 가지는 믿음이고 기도라는 거 아닙니까? 어떤 믿음입니까? 겨자씨 믿음이지요. 살아있어서 성장하는 믿음이요 이렇게 성장하는 믿음은 나중에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까지 자라는 겁니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그래서 주신 믿음의 시작은 귀신이 소리치며 떠나고 아이는 온전하게 되어 믿음은 한 어린 영혼을 마귀의 산에서 하나님의 산으로 옮겨버리는 능력이 있음을 보듯이 우리 또한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좋은 믿음의 길잡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일오전 설교동영상
24년 4월 21일 주일 예배 영상
사사기 1:16~21절 김용우 목사
2024년 4월 21일
교회앨범
심방한 가정과의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동영상앨범
22년 낙도선교회
- -
-
선유중앙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회원가입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전체 최근게시글
  • 선유중앙교회 SNS를 방문해 보세요
    교회명 : 선유중앙교회 | 담임목사 : 김진수 | 주소 : 10811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독서울 5길 18-30
    교회전화 : 031-954-1080, 953-5977 | Fax : 031-954 1040 | 목사관 : 031-952-2097 | 이메일 주소 : yegrim@hanmail.net
    Copyright ©1955~2024   sunyou.or.kr. All Rights Reserved.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031-954-1080
    선유중앙교회 전화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