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    |    |  
회원 로그인
회원 가입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가입으로 서비스 약관개인정보 보호 정책 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SUNYOU CENTERAL CHURCH
주일오전 설교원고

bo_title_img1.png

왕하5:1~14 “희망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때 이루어집니다.” 2022. 2. 13  
카카오톡 카카오 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밴드 주소복사
   김진수   작성일 22-02-10 16:39    조회 1,993    댓글 0  
 
왕하5:1~14  “희망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때 이루어집니다.”  2022. 2. 13
절망은 절망하는 자들에게만 친절하다네요 그리스신화 가운데 ‘판도라상자이야기’에서 상자를 열자 질병과 재앙이 세상에 퍼졌다지 뭡니까? 그래서 황급히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닫았는데 너무 성급했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었는데 글쎄 그것이 희망이었었다는 거 아닙니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희망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오늘 그 희망을 보는 사람이 있어 소개하면서 우리 모두 다같이 희망을 쏘아 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절을 볼까요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여기 ‘크고’ 히브리어 ‘까돌’은 ‘위대한’이란 의미이고 ‘존귀한’ 히브리어 ‘우네수 파님’은 ‘얼굴이 들어 올려진 자’란 의미로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게 뭡니까? ‘여호와께서 나아만으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여호와는 온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유일신이시고 역사의 주관자라는 거거든요 출19: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믿고 가진 신앙이 뭡니까? 하나님 이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다 하는 절대주권신앙이지요
나아만은 큰 용사랍니다. 여기 ‘큰 용사’ 히브리어 ‘낍보르 하일’은 ‘용감한 전사’라는 건데 안타까운 것이 나병환자라는 거지요  다 괜찮은데 바로 그 하나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하기가 버거워 하나님께 희망을 둘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만나게 되는 우리네 모습이라는 거거든요. 2절을 보시지요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여기 ‘어린소녀’ 히브리어 ‘카탄’은 ‘어리다’ 또는 ‘작다’라는 의미로 히브리어 ‘까돌’ ‘위대한’과 대조가 되지요 그리고 또 대조 되는 것이 뭡니까? 나아만은 ‘왕 앞에’ ‘멜레크 리프네’ 존귀한 자로 있는 반면에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에게’ 히브리어 ‘나아만 에쉐트 리프네’는 ‘나아만의 아내 앞에’ 수종 드는 비천한 자로 있었다는 거니까 외국인이면서 종의 신분이었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나아만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열쇠를 이 소녀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고전1:27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이잖아요. 그렇다면 이 소녀가 과연 복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3절을 볼까요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여기 ‘선지자 앞에’ 히브리어 ‘리프네 나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자’라는 의미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나비’는 ‘나바으’ ‘부글부글 끓어오르다’는 동사에서 온 단어로 ‘나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자라는 건데 그 선지자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원문에는 히브리어 ‘아즈’ ‘틀림없이’가 있어서 이 소녀는 선지자를 무척 신뢰하고 있었음을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쏟아내는 열정으로 인해 그 선지자는 선지자로서 신뢰받을 위치에 있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여기 ‘고치리이다’ 히브리어 ‘예에쏘프’는 ‘다시 받는다’는 의미거든요 나병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끊어져 밖으로 추방되는데서 사회가 다시 받는다는 겁니다. 이렇듯 ‘나아만 에쉐트 리프네’ ‘나아만의 아내 앞에’ 수종 드는 작은 소녀였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약탈자들에게 붙들려 그 나라 장군의 아내 앞에  이방인으로 미천한 그녀의 몸종이 되었어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는 거거든요 환경과 신분이 최악으로 바뀌어 갑작스럽게 여종이 되었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소녀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었다는 겁니다. 누가 의인이랍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이지요 의인은 환경과 신분의 변화에 상관없이 여전히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5절을 보시지요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 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여기서 어린 소녀가 전하는 믿음의 말을 소녀의 여주인도 그의 남편 나아만도 좋게 여겼고 심지어는 아람 왕까지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고 즉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서도 그럴까요? 6~7절을 보시지요.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이게 뭡니까? ‘리프네 나비’ ‘선지자 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는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부정적이었다는 거잖아요 아람왕의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주시오’라는 편지를 읽고 옷을 찢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왕은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의 삶에선 적용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 나는 못하지만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하셔 그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엘리사선지자가 있잖아 했어야 했다는 거지요 우리도 그렇지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받으리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절망에 옷을 찢는 경우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이스라엘왕은 누구보다도 ‘리프네 하비’ ‘선지자 앞에’ 있으면서도 선지자 엘리사가 보이지 않았다는 거고 엘리사가 어떤 일들을 이루고 있는지 듣고 있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7절에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나아만에게 알리겠다는 거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왕에게 알리겠다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겁니다. 뭡니까? 멀리 아람에 끌려가 몸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소녀도 듣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종 엘리사선지자에 대해서 사마리아 궁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왕은 눈감고 귀 막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10절을 보시지요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요단강물에 일곱 번 씻으면 된다면 나아만은 자신의 나라에 다메섹의 두 강 아바나와 바르발에서 씻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는 거지요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나아만은 지금 희망의 역사를 이룰 수 없도록 자기생각이라는 장애물을 만났음을 본다는 거지요 베이징 올림픽 첫 금메달리스트가 된 황대헌선수는 쇼트트랙 1000미터 경기에서 제일 먼저 들어오고도 실격처리 되었을 때 마이클 조던의 말을 인용해 “장애물을 만났다고 반드시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벽에 부딪힌다면 돌아서서 포기하지 말라 어떻게 하면 벽에 오를지 벽을 뚫고 나갈 수 있을지 또는 돌아나갈 방법이 없는지 생각하라” 우리도 인생의 장애물을 만났을 때 내 생각이 문제지요 내 생각 때문에 나아만은 지금 자신의 나라로 떠나려 하고 있음을 봅니다. 11절에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내 생각과 내 뜻에 붙잡혀 있는 자에겐 하나님이 서실 자리가 없다는 거지요 그리고 내 생각과 내 뜻엔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절대로 한계에 부딪히는 일이 없다는 건데 그렇다면 희망을 보기 위해서 분명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취하는 거지요 왜요? 사55:8~9절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차원이 달르다는 거고 높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나아만도 그렇고 우리도 우리의 생각이 앞서면 희망보다는 절망에 젖게 되니까 희망은 내 생각과 나의 교만과 내 고집을 꺾을 때 하나님의 회복하게 하심의 큰 능력을 경험하는 희망을 보는 것인데 다행스럽게 나아만은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내하고 순종하여 14절에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여기 ‘회복되어’ 히브리어 ‘웨야쇼브’는 ‘되돌아가다’라는 의미거든요 나병이 생기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건강을 찾는다는 겁니다. 바로 그거네요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이게 중요하다는 거잖아요 캘리포니아 말리브에 있는 페퍼다 대학교의 졸업식날이었습니다. 그날 1백명의 학생들이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대학 졸업자의 평균연령이 40세 가까왔습니다. 고령의 졸업자 가운데 67세의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는 10명의 자녀와 27명의 손자 손녀를 가진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가 학사 학위를 받으려고 단상에 올라가자 한 백발의 노인과 여러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에서 환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드디어 해내셨군요. 할머니, 잘하셨어요. 드디어 성공하셨어요.″ 졸업식이 끝나고 그 할머니는 자기 목사님을 만나 격정에 못이겨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에게 만약 믿음을 심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하나님이 내가 죄절할 때마다 나에게 새힘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작하자마자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육체만 고친 것이 아니지요 15절에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영과 육이 치료 받은 나아만을 봅니다. 내 생각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들지 말자구요 권세 있는 아람왕의 친서도 나아만의 생각도 희망이 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때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고침을 받는 희망 결실의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생각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영과 육이 모두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일오전 설교동영상
24년 5월 12일 주일 예배 영상
하박국 2:4 김용우 목사
2025년 5월 12일
교회앨범
봄맞이 교회 대청소 및 새단장 
동영상앨범
22년 낙도선교회
- -
-
선유중앙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회원가입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전체 최근게시글
  • 선유중앙교회 SNS를 방문해 보세요
    교회명 : 선유중앙교회 | 담임목사 : 김용우 | 주소 : 10811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독서울 5길 18-30
    교회전화 : 031-954-1080, 953-5977 | Fax : 031-954 1040 | 목사관 : 031-952-2097 | 이메일 주소 : yegrim@hanmail.net
    Copyright ©1955~2024   sunyou.or.kr. All Rights Reserved.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031-954-1080
    선유중앙교회 전화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