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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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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1~13 “절대믿음 절대순종에서 하나님 경외자의 삶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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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1-11-25 16:59    조회 2,557    댓글 0  
 
창22:1~13 “절대믿음 절대순종에서 하나님 경외자의 삶을 봅니다”  2021.11.28.
둥근 접시는 언제라도 무엇을 담아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이 둥근 접시가 깨어지게 되면 문제는 달라지죠. 아주 날카로운 칼처럼 되어 무엇을 담는 것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된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는 거지요 은혜 안에 머물 때는 하나님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귀한 그릇이 되지만 깨어져 상처가 난 마음은 은혜는 떠나고 날카로운 칼이 되어 언제든 다른 이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남긴다는 거 아닙니까?

2절을 보시지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 번제로 드려야할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존재임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까? ‘네 아들’이라고 하시지요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도 하십니다. 여기 ‘독자’ 히브리어 ‘야히드’는 ‘부모에게 유일하다니까 매우 귀중한’ 또는 ‘내 귀중한 생명’이란 의미라는 겁니다. 마3:17절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뭡니까? 하나님에게 있어서 독자 예수그리스도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다르지 않은 독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을 보게 되잖아요. ‘네 아들’ 또 ‘네 사랑하는 독자’요 그 이름이 ‘이삭’이라고 세 가지로 말씀하심을 통해 뭡니까? 그 만큼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끔찍한 존재라는 거지요 이 끔찍하게도 사랑하고 귀중한 생명 같은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서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이라는 거지요 하나님이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삼으려는 의도가 사실은 아니지요 죄성을 가진 사람이 번제로 드린들 자기 죄로 인해 죽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신 걸까요? 이는 하나님이 끔찍이도 사랑하고 귀중한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주시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뭘까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뭘 보기를 원하신다는 겁니까? 끔찍이도 사랑하고 귀중한 생명 같은 독자의 존재보다도 큰 기쁨은 하나님이시고 최고의 큰 소망도 하나님이시고 삶의 목적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다윗이 그랬지요 시16:2절에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그리고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라는 말씀에서 원문엔 히브리어 ‘나’가 있어서 ‘원하건대’라는 의미가 있는 명령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아들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일은 강압적인 명령이기 보다는 아브라함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었던 명령이었다는 겁니다. 끔찍이도 사랑하고 매우 귀중한 생명 같은 존재가 이삭이거든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요구에 갈등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의 계명으로 말씀하심이 뭡니까? 신30:6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기서 뭘 깨닫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내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세상 욕망적인 것을 할례, 베어 버리심으로 가능하다는 거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면 손해가 아니라 뭐래요?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신앙에서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시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6절을 볼까요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여기서 예배가 우선임을 아들이삭에게 가르치고 있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본다는 거잖아요 예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요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지요 나무를 진 이삭에게서 십자가지신 예수 그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잖아요. 오늘날도 십자가 예수 빠지면 예배가 아니지요 그 다음이 불이라는 건데 불은 제단 숯불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지져버리는 정화의 능력이거든요 그리고 예배에 필요한 것이 칼인데 칼은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자르고 그리고 각을 떠서 태워서 번제로 드려지도록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죽이고 벗기고 자르고 각을 뜰 대상이 누구랍니까? 자신의 아들이삭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예배의 요소가 뭡니까? 십자가 예수, 회개의 정화 그리고 각을 뜨듯이 소홀함이 없이 온전하게 드려지는 예배자 즉 우리 자신인 거지요 우리가 드려지는 예배에서 항상 이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배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뭔가를 말씀하지요 그것이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우리가 돌아오리라’ 히브리어 ‘웨나슈바’라고 말하더라는 거지요 뭡니까? 번제로 드려지면 없어져야 하는 이삭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돌아오리라 해야 맞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아브라함의 탁월한 믿음의 신앙고백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신약 히브리기자가 히11:19절에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오늘날 우리가 드려지는 예배에 대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히11:6절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드려지는 우리 예배에도 ‘그가 계시다’ 그러므로 뭡니까? 절망에서 희망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어둠에서 빛을 사망에서 생명을 보는 예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8절을 보시지요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뭡니까? 아직도 자신이 제물인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오늘날도 그렇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인데 자꾸 다른 것에서 찾으려한다는 거거든요 우리 모두 예배자로 함께 롬12:1절을 읽어볼까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리고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아브라함의 말에서 뭘 배웁니까? 예배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거고 그 희생제물도 하나님이 손수 장만하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뭘 보고 있습니까?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 이천 년 후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그리스도까지 본다는 거지요 어린양 예수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거잖아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 것을 우리는 믿고 구원 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9절을 볼까요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여기 <그곳> 히브리어 <함마콤>은 막연한 어디쯤이 아니라 정확하게 바로 그곳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겐 대충이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무오함을 알기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본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했대요. 이제는 알게 되었지요 자신이 번제물이 되어 죽어야 한다는 거 그리고 아무 저항 없이 순종하는 이삭을 봅니다. 이 모습에서 장차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잖아요. 이것을 빌2:8절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소개하지요. 10절을 보시지요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기 ‘아들을 잡으려 했다’는 거거든요 ‘잡으려’ 히브리어 ‘솨하트’는 ‘도륙하다’ 또는 ‘목을 자르다’는 의미니까 아브라함이 철저한 자기 부정과 자기 부인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16: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아들을 잡으려는 이 모습에서 12절에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를 절대 믿음 절대 순종하는 모습에서 보셨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절대 믿음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심으로 응답하시잖아요. 13절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우리 개역개정성경에선 너무도 밋밋하잖아요. 그러나 원문에서는 ‘힌네’ ‘보라’는 감탄사가 있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보고 있다는 거거든요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의 절대 믿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성취되더라는 거 아들이삭은 아버지의 절대믿음과 그 믿음에 따르는 하나님의 보상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봤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숫양으로 이삭을 대신해서 번제로 드렸다는 건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대속의 제물이신 예수 없이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거 기억하고 구속함을 받은 백성으로 절대믿음 절대순종에서 경외하는 자로 인정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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