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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1~3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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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0-12-18 16:54    조회 4,484    댓글 0  
 
고전1:1~3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20.12.20
고린도전서는 바울사도가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설립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먼저 보낸 편지를 말하지요 그렇다면 바울 당시의 고린도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지중해 해안의 중심도시였었다는 거고 그 당시 로마 제국에서 내 노라 하는 도시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는 거지요 고린도는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 때 아가야주의 수도가 되었고 바울사도 당시 고린도에 살고 있는 자유인이 20만 명 그리고 그들이 부리는 노예가 그 배가 되는 40만 명 모두 60만 명이나 되는 거대 도시였다는 겁니다 행18:4절에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뭡니까? 고린도에는 이미 유대인들의 회당이었었다는 거고 바울은 그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강론하고 권면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당시 고린도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해안도시로서 활발한 무역으로 무엇보다 경제가 발달하였고 그러므로 고린도인들은 재정적인 풍요로움과 더불어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는 거고 돈이 많다보니 돈을 쫓는 향락산업의 발달로 인해 성적으로 문란했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문제들로 사건 사고가 많은 도시였었다는 거거든요 그러다보니 그 당시 <고린도 사람처럼 사네> 라는 유행어가 생겼는데 그 의미가 <돈을 밝히고 쾌락을 즐기는 경박한 사람>을 말한다는 거지요
또 하나 고린도에선 그리스 4대 경기 대회의 하나인 지금의 올림픽 경기에 해당하는 이스트모스축제가 2년에 한 번씩 열렸는데 약 2년간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사역했던 바울사도는 이 올림픽축제에 출전해서 경기하는 선수의 모습과 상 받는 것을 보고 고전9:24~25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 올림픽을 그 누구들보다 많이 보고 이해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래 선수들이 다 달릴 지라도 상 받는 사람은 하나지 성도들 역시 천국 푯대를 향해 달음질하는 자이니 하늘의 상 받기를 위해서 달려야지 저들 올림픽 선수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저렇게 노력하고 애를 쓰는데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고자 함에 있어서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되지 또 면류관을 얻는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선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 역시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는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선 모든 일에 절제해야지 올림픽을 예로 들어 가르쳤다는 겁니다.

1절을 볼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여기서 바울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너무도 분명하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있음을 본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답니다. 이처럼 장황하게 자기소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겠지요.  세 가지로 그 이유를 말씀 드릴 수 있는데 그 하나가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3:4절에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뭡니까? 교회 내 파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럼으로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인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9:2~3절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뭡니까? 사도가 아니라고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잖아요 아! 그래서 바울사도가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다소 장황하게 자기를 소개 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해하게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자신이 전하는 복음 때문이란 거지요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가 전하는 거니까 그만큼 복음이 진실하고 신실하다는 거지요
여기 ‘사도’ 헬라어 ‘아포스텔로스’는 의미가 ‘보냄을 받은 자’거든요 기본적으로 사도는 가룟유다를 대신하여 제자가 된 맛디아를 포함한 열두제자를 말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초대교회에 이르러서 조금 그 범위가 넓혀져서 사도로 부르는 이들이 있었는데 행14:4절에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여기 바울과 바나바를 두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음을 본다는 겁니다.
사실 사도가 되기 이 전에 바울이 누굽니까? 예수님을 배척하는데 앞장섰던 사람 아닙니까? 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잔해하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랬던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하게 된 후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했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고 인생관과 가치관마저 바뀌어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잖아요 그런 그가 지금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사도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사도가 되었다는 말은 자신의 사도성을 자랑하려는 것보다는 뭡니까? 사도로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의심치 말고 뭡니까? 잘 지키라는 거지요
그리고 ‘형제 소스데네’랍니다. 바울사도는 동역자 소스데네를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지요 ‘형제’ 헬라어 ‘아델포스’는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자’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된 영적형제라는 의미인거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형제라고 소개할 정도인 소스데네는 어떤 사람일까? 행18:17절에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아~ 그렇구나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었고 바울의 전도로 예수 믿고 바울이 형제라고 부르며 주를 위해 매를 맞을 정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깊은 신앙인이 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2절을 보시지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여기서 고린도교회라고 하지 않고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한 겁니다. 그렇다면 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까요? 바울로부터 고린도전서를 받았을 때 고린도는 아가야라는 로마행정구역의 수도였고 이 고린도엔 로마의 총독이 거주하는 관저가 있었고 거기다가 많은 우상을 섬기면서 음란한 행위를 즐겼고 또 활발한 무역으로 지역에 돈이 돌다보니까 향락이 산업이 발달하고 따라서 도덕적 또는 윤리적으로 매우 타락한 행태를 가지고 있는 도시가 고린도였었는데 이런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라고 하지 않고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요 뭐랍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거지요 우리가 이 말씀에서 깨달아지는 것이 뭡니까? 우리의 성결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우리가 획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죄 없이함이고 부활로서 죄 없어졌고 의롭게 되었다는 확증이잖아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누굽니까? 과거 고린도의 윤리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 그리고 음란한 우상숭배와 향락에 젖었던 사람들이었던 이들을 하나님은 성도로 부르셨다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성도가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뭡니까? 예전에 고린도시민으로 살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하나님이 부르심에 걸 맞는 삶을 사는 성도여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원하는 바라는 거거든요 이 말씀은 우리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잖아요. <어느 목회자들 모임에 모임을 주관하는 그 교회 장로님이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을 안내 할 때 이리 오시지요 성도님 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안색이 달라지면서 난 목사입니다 그러더라는 거지요 장로님 생각은 뭐였을까요? 목사보다 더 고마운 이름이 뭐라는 겁니까? 성도라는 거지요>

3절을 보시지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고 축복하고 있음을 봅니다. ‘은혜’ 헬라어 ‘카리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대가 없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을 말하지요 그리고 ‘평강’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인들이 인사말로 사용하는 솰롬에서 온 단어인데 ‘단순히 분쟁이 없는’ 소극적 의미보다는 뭡니까? ‘하나님과 더불어 완전한 하나됨을 이루는 풍요한 영적상태’로서의 적극적 의미가 ‘에이레네라’는 거거든요
안셀름 그린 신부의 아침을 여는 메시지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라는 제목의 책에서 <날마다 하루는 반가운 초대인데 아침이 밝아 오면 새로운 삶이 당신을 기다린다. 눈부시고 다채로운 삶이 낡은 하루가 가고 새 하루가 찾아왔다 오늘 하루가 어떤 하루일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가슴 짓누르는 부담으로 혹은 설레는 약속처럼 느낄 수도 있다 나를 위한 날이 밝았다며 기뻐할 수도 있고 씻지도 않은 채 기운 없이 무덤덤할 수도 있다 오늘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본다> 성경에도 있지요 신30:19절에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로 살면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하나님과 완전한 하나됨을 이루는 풍요한 영적 상태인 에이레네, 평강으로 인도받는 삶인 줄 믿습니다.
우종영씨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는 책>에서 거의 모든 나무들은 <나이테> 하나씩 지니고 있답니다. 자기 나이만큼 살아온 날을 나이테에다 남겨 놓는다는 거지요. 실제로 나무는 성장하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마치 자서전처럼 나이테에 고스란히 남기는 겁니다 나이테가 간격이 넓고 연한 색은 당시 환경이 풍족했다는 뜻이고 반대로 나이테 간격이 좁고 색이 짙으면 그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시련을 겪었다는 뜻이랍니다. 또한 세포분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봄에는 나이테에 밝은 자국이 남지만 봄 이후에는 더디게 자라기 때문에 어두운 자국이 남는 다네요 그리고 기후 조건이나 영양 상태가 안 좋으면 나이테의 간격이 좁아진답니다. 그만큼 생존을 위해 치열한 사투를 치렀다는 증거라는 걸 말한다는 겁니다. 나이테는 자신은 보지 못하나 죽고 나면 나무를 자른 사람들이 본다는 거지요
어디 나무뿐이겠습니까? 인간도 자신만의 생의 나이테를 남기게 되어 있지요. 이제 올 해도 열흘 남짓이면 나이테를 하나 더 남기겠지요. 지나간 일 년 동안 우리가 만든 나이테는 깨끗하고 선명할까요? 어떤 자국을 남길 것인지는 그동안 우리가 살아 온대로 형성 될 터인데 나는 모르지만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의 나이테를 모두 보실 분이 계시지요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선악 간에 행한 대로 밝히 드러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그래서 하루하루 아름다움이 쌓여져 일 년의 나이테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나이테를 잘 남기기를 원한다면 성도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힘입어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사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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