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    |    |  
회원 로그인
회원 가입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가입으로 서비스 약관개인정보 보호 정책 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SUNYOU CENTERAL CHURCH
주일오전 설교원고

bo_title_img1.png

시9:1~17절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감사 장차 베푸실 은혜를 감사”  
카카오톡 카카오 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밴드 주소복사
   김진수   작성일 19-10-18 17:03    조회 6,040    댓글 0  
 
시9:1~17절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감사 장차 베푸실 은혜를 감사”  2019.10.20.
표제에서 다윗의 시라고 말씀하고 그러면서 ‘인도자를 따라’ 이 말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뛰어난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 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이어서 ‘뭇랍벤’에 맞춘 노래랍니다. 시편이 모두 150편인데 ‘뭇랍벤’이라는 단어가 단 한차례 여기 시편 9편에서만 소개하고 있다는 거지요 흔하지 않은 단어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보통 세 가지 학설로 정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아들의 죽음에 맞춘 노래라는 것과 또 하나는 ‘뭇랍벤’을 악기의 하나로 보는 학설과 또 다른 하나는 여성합창단으로 보는 학설인데 이 학설이 확률이 낮은 이유는 과연 여성들이 그때 그 당시 활동할 수 있었겠느냐 그렇다면 아들의 죽음에 맞춘 노래라는 것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학설이랍니다.  그리고 본 시의 특징은 다윗이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의 마음으로 노래하였다는 것과 더불어 장차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감사함으로 드려진 노래라는 겁니다.

1절을 볼까요.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전심으로’ 뭡니까? ‘내가 내 마음을 다해’라는 거잖아요 이 말에서 뭘 느낍니까? 입술로는 감사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가 되지요 그렇다면 다윗이 이렇듯 마음을 다해서 감사하는 이유가 뭘까요? 4절이지요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억울하고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적들로부터 당했을 때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억울한 송사를 위해 변호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만국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지요 분명히 송사를 당할 만큼 자신의 의가 훼손이 되는 그래서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했지만 사실은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감사할 이유를 주신다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송사해 주시고 심판해 주시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3절이지요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내 원수들이 ‘넘어져’ 히브리어 ‘익카쉘루’는 ‘비틀거리며 넘어지다’거든요 지금 다윗의 원수를 하나님이 갚아주시고 계신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롬12: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이 갚아주시니까 깨끗하잖아요. 그렇지 않고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고 나서면 우리도 힘들고 원수도 힘들고 원수는 원수를 낳고 복잡해진다는 거지요
그 다음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뭡니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개인적 감사로만 만족하지 않고 전하겠다는 거지요 여기 ‘전하리이다’ 히브리어 ‘아쌉페라’는 ‘돌 위에 새기다’거든요 그러니까 대대로 계속해서 전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원수로 인해 당한 가슴 아픈 일을 하나님은 감사로 바꾸신 바로 그 일이 기이한 일이라는 거지요
2절을 보시지요.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여기서 다윗이 세 개의 동사를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하나가 ‘기뻐하고’ 히브리어 ‘에스메하’ 그 다음 ‘즐거워하며’ 히브리어 ‘웨에엘르차’ 그리고 ‘찬송하리니’ 히브리어 ‘아잠메라’ 그런데 이 세 단어가 ‘아쌉페라’ ‘전하리’라는 말처럼 돌 위에 새기듯 대대로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기뻐하고 자발적으로 즐거워하고 자발적으로 찬송하겠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이런 삶이 어디서 출발한다는 겁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거지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기뻐할 수도 즐거워할 수도 찬송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아담과 하와가 그랬지요. 범죄하고 난 후 그들은 찬송은커녕 나무 사이에 숨기에 급급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다윗의 신앙상태가 어떠했었다는 겁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거지요. 롬3:30절에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할례자인 유대인도 예수 믿어야 하고 무할례자인 이방인들도 예수 믿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절을 볼까요.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여기 ‘이방 나라들’ 히브리어 ‘고임’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백성을 총칭하는 단어’거든요 그리고 이들 이방나라들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대적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이라 하시고 멸하신다는 겁니다. 여기 ‘책망’ 히브리어 ‘까아르타’거든요 이 ‘책망’ ‘까아르타’는 ‘죄를 드러내어 변명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의미라는 거지요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다잖아요. 여기 ‘지우다’ 히브리어 ‘마히타’는 ‘뭔가를 가지고 문질러서 없애버리다’는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뭡니까? 완전한 심판을 행하셨다는 거잖아요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갑작스럽게 뒤에서 행진에 뒤쳐진 사람들을 급습해 들어오는 아말렉군사들로 인해서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모세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고 자신은 아론과 훌과 함께 전장터가 훤히 보이는 높은 산에 올라서 손을 들어 기도하게 되지요 그런데 기도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가면 아말렉군사가 이기고 이거 안 되겠다 싶어 다시 기도의 손을 힘들게 올리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는 겁니다. 함께 올라갔던 아론과 훌도 눈이 있는데 왜 이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돌을 갖다가  모세로 앉게 하고 양 옆에서 모세의 팔을 하나씩 붙들고 있으니까 이스라엘군대가 지는 일 없이 마침내 그들을 모두 물리쳤다는 거잖아요 뭡니까? 아말렉군대는 이스라엘군대를 대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징계가 뭐랍니까? 그들의 이름을 ‘마히타’ 문질러서 지워버리신다는 거 아닙니까? 출17: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이 지워버리시니 본문 6절에서 어떻게 되었답니까?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기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이랍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초입에 만났던 여리고성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으로 무너뜨리셨지요. 그보다 훨씬 작은 아이 성에선 이스라엘백성이 참패했잖아요. 참패의 원인을 찾아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아간이 노획한 물건에 탐을 내 숨겨두었던 때문인 걸 알고 그 아간을 이스라엘 무리에서 뽑아내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때 비로소 그 성읍이 하나님 앞에 무너졌다는 거 아닙니까?
뭡니까? 사람들의 전쟁이기 전에 영적싸움이었다는 거잖아요 다윗도 영적싸움이라는 걸 알고 기도와 하나님의 성품으로 무장할 때 하나님은 그 대적의 성을 무너뜨리셨다는 거지요 15~16절에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그런데 여기 ‘힉가욘’이랍니다. 시편 7편 표제에 ‘식가욘’이라했잖아요. 이 ‘식가욘’의 의미는 ‘비틀거리다, 방황하다’이니까 다윗이 받은 충격이 너무나 심해서 비틀거리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상태를 노래한 시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렇다면 ‘힉가욘’은 뭘 말하는 걸까요? ‘힉가욘’은 ‘묵상하다’ 또는 ‘생각하다’라는 히브리어 ‘하가’에서 온 단어이기 때문에 지금 시편노래의 삼분이 정도 된 부분에서 뭡니까? 잠깐 ‘묵상하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의미를 알고 나니까 참 새롭지요. 그리고 ‘셀라’라 하는 것은 ‘음의 변화를 주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본문 7~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그래서 그 판결이 뭡니까? 17절에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결국이지요 뭡니까? 스올 지옥으로 돌아간다는 거지요 

9절을 볼까요.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기 ‘요새’ 히브리어 ‘미스까브’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곳을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대적도 ‘예흐와 미스까브’ ‘여호와를 요새’로 피난처로 삼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해낼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므로 안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임금에게 압제당하는 때에도 하나님은 요새 피난처 ‘미스까브’가 되셨지요 그런가하면 완전무장하고 보통 사람들보다 배나 큰 거인 골리앗을 만난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이 다윗의 요새 ‘미스까브’가 되어주시는 걸 수도 없이 경험하면서 살아온 것에 대한 노래가 바로 9절이라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10절에 자신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잖아요.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여기 ‘주의 이름’ 히브리어 ‘쉐메카’는 ‘쉠’이 ‘이름’인데 이인칭 소유격 접미사가 합쳐져 ‘당신의 이름’이라는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안다는 건 뭡니까?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을 가까이 친밀히 섬기는 관계로 살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압제 당할 때도 환난의 때에도 주를 의지하기 위해서 달려갔었고 그때마다 경험한 것이 뭐랍니까?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거였지요. 이 같은 사실을 자신이 양을 칠 때 수도 없이 경험했잖아요. 여기 ‘버리지 않다’ 히브리어 ‘아자브타’는 ‘짐승을 놓아주다’라는 의미거든요 자신이 치던 양이 맹수에게 붙들려 밥이 되려는 찰나에 달려들어서 맹수를 물리치고 뭡니까? ‘짐승을 놓아주는’ 이것이 ‘버리지 않는’ ‘아자브타’라는 거지요 이렇듯 다윗은 자신이 친근해서 달려가는 ‘요새’ ‘미스까브’이신 하나님께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였고 또 앞으로 베푸실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했다는 걸 기억하면서 우리 또한 범사에 감사하고 지금의 어려움도 감사로 바꾸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고 감사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일오전 설교동영상
24년 5월 12일 주일 예배 영상
하박국 2:4 김용우 목사
2025년 5월 12일
교회앨범
담임목사 위임·원로목사 추대 및 임직… 
동영상앨범
22년 낙도선교회
- -
-
선유중앙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회원가입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전체 최근게시글
  • 선유중앙교회 SNS를 방문해 보세요
    교회명 : 선유중앙교회 | 담임목사 : 김용우 | 주소 : 10811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독서울 5길 18-30
    교회전화 : 031-954-1080, 953-5977 | Fax : 031-954 1040 | 목사관 : 031-952-2097 | 이메일 주소 : yegrim@hanmail.net
    Copyright ©1955~2024   sunyou.or.kr. All Rights Reserved.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031-954-1080
    선유중앙교회 전화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