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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5:13~27절 “예수가 죽은 것을 살아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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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2-03-24 00:00    조회 5,885    댓글 0  
 
행25:13~27절          “예수가 죽은 것을 살아있다고”     2012. 3.25
베스도가 새 총독이 되어 유대에 부임하게 되자 헤롯가의 마지막 왕인 아그립바2세와 버니게가 문안하기 위해서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이렇게 방문한 아그립바2세에게 베스도총독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바울의 말 때문에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것이지 다른 죄목은 발견할 수 없었다 말하면서 자문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그립바2세는 나도 바울의 말을 듣고 싶다고 하였고 그래서 다음날 아그립바2세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장소에 들어와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저는 여기서 옷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두 사람 아그립바2세와 버니게를 봅니다. 저들이 입은 옷은 저들을 크게 위엄 있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전혀 위엄스럽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그립바2세의 증조할아버지는 헤롯대왕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에 태어난 두 살밑에 모든 어린아이를 죽게 한 사람이었고 그의 가운데 할아버지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게 한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을 심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아그립바2세의 아버지 아그립바1세는 요한의 형제인 사도야고보를 죽인 사람이었으며 이것을 유대인들이 좋아하자 베드로사도도 붙잡아 들이기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 얼마 있지 않아서 죽거나 수치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행12:21절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여기서 이 헤롯이 바로 아그립바2세의 아버지인 아그립바1세인데 이 말씀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가 새로운 천으로 왕복을 해서 입고 단상에 앉아서 연설을 할 때 햇빛에 비쳐 옷이 광채가 나서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낀 유대백성들이 신이다 그가 하는 소리는 신의 소리다 하게 될 때 신처럼 굴다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아그립바1세를 하나님의 사자가 질병으로 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헤롯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헤롯의 후손들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악연을 연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그 헤롯가의 마지막 왕 아그립바2세에게 베스도총독이 자문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그립바2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1세는 아그립바2세와 세 딸 버니게와 마리암네 그리고 두르실라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 두르실라는 지난 설교 때 말씀을 드린 것처럼 열네 살 때 에메사의 왕 아지주스의 아내가 되었다가 후에 벨릭스총독의 눈에 띠여서 남편을 버리고 벨릭스총독의 아내가 되었고 그의 형제 버니게는 자신의 친 삼촌인 헤롯에게 시집을 갔다가 죽자 오빠 아그립바2세와 좋지 않은 소문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고 다시 길리기아의 왕 포레모와 결혼하였다가 버리고 다시 오빠인 아그립바2세에게 돌아왔다가 세 번 째 남편인 본도의 왕 폴레몬과 결혼하였다가 다시 헤어져 오빠인 아그립바2세가 다스리는 시리아지역으로 찾아가 거기서 함께 있으면서 자신의 오빠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죄악 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유대의 역사가들과 로마의 역사가들 모두가 일치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을 보면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그 다음날 아그립바2세와 버니게 여전히 함께 하면서 그럴듯하게 왕을 상징하고 왕비를 상징하는 옷으로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입은 옷으로 위엄을 크게 갖추었지만 그 위엄은 그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너무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잘 포장된 왕과 왕비도 아니면서 왕비처럼 포장된 여인이 겉과는 다르게 부끄러운 아그립바2세였고 그의 여동생이면서 연인인 버니게였습니다. 벧후2:14절입니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그들과 다르게 우리 왕이신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전혀 포장되지 않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53:2절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무엇입니까? 포장되지 않은 마른 땅과 같은 또 거기서 나온 뿌리같이 아무런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1:21~22절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겉은 위엄을 갖춘 어떤 포장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에서 나오는 가르침은 위엄으로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왜 교회에 나오지 않으십니까? 물었을 때 여러 대답 중에 하나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위선적 행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뜨거운 신앙생활과는 다르게 사회에 나가선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으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중적이십니까?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그분은 너무도 이중적일 것 같은데 오히려 이중적이기보다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세 분은 각기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이시고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의 인격인 사랑하시는 인격을 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인격은 우리 믿는 자들이 반드시 가져야할 인격임을 말씀하십니다.
요1서4장7절~9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하심이라.”
아그립바2세와 버니게는 자신들의 위엄이 없는 삶을 가리기 위해서 옷으로 그 위엄을 대신하였습니다마는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내려놓으시고 오히려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셨고 그러므로 기꺼이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로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 신화에 보면 사람이 이 세상에 창조된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그 신화에서 너무나 더운 날씨가 계속되다보니까 신들도 생활하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라서 이 신들이 회합을 가졌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기를 신전 안에 있다면 서늘하여 얼마나 좋겠느냐 신전을 짓도록 하자는 결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위가 높은 신들이 지위가 낮은 신들에게 신전 짓는 일을 시켰는데 지위가 낮은 신들이 무더운 날씨에 너무나 힘든 나머지 반란을 일으켜서 지위가 높은 신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신들인 우리가 신전을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어서 그들로 신전을 짓게 한다면 되지 않겠느냐 해서 사람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인간들이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 수많은 신전들을 만들었다는 것이 바벨론 신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위엄을 버리고 오히려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고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그립바2세나 버니게처럼 우리를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포장에만 관심이 많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베드로사도가 벧전3:3절로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갚진 것이니라.” 위엄은 입는 옷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포장된 삶이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데서 오는 것임을 알아서 이런 주님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분들이 되시므로 진짜 위엄을 갖춘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에게서 다른 죄목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고 바울은 죽었던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을 외치는 일뿐이었다는 베스도총독의 평가입니다. 베스도총독은 바울이 지금 유대인들 유력자들에게 고발을 당하게 된 이유가 어떤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고 또 정치적인 문제도 아니고 종교적인 문제였음을 정확하게 끄집어 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믿음 때문에 유대교와 결별하였습니다. 예수가 살았다는 확신 때문에 부활을 이론적으로만 믿는 외식과 의식주의 신앙에서 과감하게 털고 일어났습니다. 예수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동안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자랑삼던 경건하고 엄격한 바리새적인 신앙을 분토처럼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어떤 거리감을 느끼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식이나 금식 그리고 절기를 지킴으로써 예수님을 붙들고 그 예수님을 느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살아계셨고 바울과 함께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구원의 조건은 오직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했던 할례를 행하는 일이나 사람들이 정한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는 일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확신에 찼기 때문에 유대인들인 자기 민족이 율법에 매여 사는 신앙생활이 다인 것처럼 여기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족을 사랑하여 세 차례의 전도여행을 다녔고 목숨의 위태로움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였고 참으로 많은 상심과 고뇌를 겪었습니다. 바울에게 부활의 신앙이 없었다면 신약 삼분 일이나 되는 서신서들이 기록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로마의 가이사에게 상소한 일도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확신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 로마군대의 영내의 구치소에 있는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인생의 밤을 맞은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평가하기를 저 사람은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라고 말해 줄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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