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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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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0-12-11 00:00    조회 4,361    댓글 0  
 
사도행전9:36~43절         “시체를 향하여”         2010. 12. 12
한 여성도가 죽었습니다. 본문 36~37절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나무와 사람은 죽어서 누워봐야 그 나무의 크기와 사람의 크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나무가 산에 서 있을 때는 이 나무가 과연 얼마나 큰 나무인지 잘 모르는데 나무를 잘라놓고 누워있는 나무를 보면 이 나무가 얼마나 큰 나무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시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살았을 때는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사람인지 잘 모르다가 죽고 나면 그 사람이 과연 얼마나 큰 사람이었는지를 남은 사람들이 평가해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비다가 그렇습니다. 이 여성도가 죽고 나니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큰 여자였었다고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태어남과 죽음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사실은 죽음을 안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뿐이지 사람이 살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도 함께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무엇이냐 묻는 사람들에게 답하기를 생노병사라고 대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한 단어에 이미 태어남과 죽음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옥한흠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남은 사람들이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로 평가를 내리면서도 한 목소리였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기독교계에 큰 별이 졌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이 말에 공감하면서 누구나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데 잘 살아야겠다 그것이 바로 잘 죽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유명한 코메디언이 죽으면서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웃다 죽다”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 자신이 사는 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후회 없이 죽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비다가 살았을 적에 잘 살았습니다. 성도로서 여제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신앙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또 성도의 표지이기도 한 선행과 구제 역시 자신의 것으로 칭찬을 들을만한 그런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병들어서 죽었을 때 다비다를 알고 있는 많은 여인들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했고 모두가 그녀가 큰 여인이었다는 확인을 줄 만한 증거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죽은 다비다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웰 다잉 잘 죽는 것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비다에게서 배우는 또 하나의 교훈은 웨 다잉 잘 죽는 것은 살았을 적에 웰 라이프 잘 살지 않으면 절대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죽음에 대해 동양사상은 매우 비관적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말을 잘 꺼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매우 재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기분이 나쁜 일이요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잘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잘 사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기독교적인 사상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죽음을 아주 귀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비관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들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줄곧 행하여 오던 선행과 구제를 죽음이 올 때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더 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이곳에서의 선행과 구제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멈출 수 없는 선한 삶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요14:2절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죽음이 끝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이 저주요 고통이라고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의 죽음이 주는 축복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 계신 천국에 예수 믿고 죽는 자가 거할 곳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이곳 천국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예비하셨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천국에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적 죽음관을 가지고 있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딤후4:6~8절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바울도 죽음이 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날이 가까이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 사명을 다했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에서는 이렇게 잘 산 자신을 위하여 의의면류관을 예수께서 주실 것이고 자신처럼 주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 재림 때 예수님을 만난다면 그들에게도 의의 면류관을 나처럼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삶의 통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음 이후가 더욱 아름답고 행복한 것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천국을 바라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사도바울과 다비다처럼 현세보다 아름다운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현재를 믿음으로 살고 성도로서 구제하고 선행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계20:12절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사람이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일이라면 웰 다잉 잘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웨 라이프 잘 사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8~39절입니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사도가 룻다에서 욥바로 왔습니다. 죽은 다비다가 있는 그 다락방으로 말입니다. 이왕 죽었으니 장사지내지 않고 왜 나를 찾아왔는가 말하지 않고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간청대로 욥바의 다비다의 시체가 누워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난 주 성도인 애니아가 중풍으로 8년 동안 누워 있는 현장에서 베드로를 주장하시는 성령님은 베드로에게 강한 영감을 주셨었습니다. “예수께서 낫게 하신다고” 그래서 도저히 세상의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망이 없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비록 다비다가 죽었지만 성령님은 베드로에게 그들을 따라 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성령님의 인도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40절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다
시체라면 더 이상 육신적으로는 살 소망이 끊겨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독교는 세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종교입니다. 에스골골짜기에는 수많은 군사가 죽어 마른뼈들로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의 생각입니다. 사람으로는 어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십니다. 에스겔에게 시체도 아니고 마른뼈들을 향하여 외치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외친 것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이뼈 저뼈들이 자기뼈들을 찾아서 맞혀지기 시작하더니 살이 입혀지고 생기가 들어가더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니까 시체가 일어나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므로 생명이 필요한 자들에게 주셔서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체 상하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장사한 무덤 앞에 서셨습니다. 돌문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신 후에 시체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서 순종하여 무덤 밖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처럼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무릎 꿇고 기도한 후에 시체처럼 소망이 끊겨진 것들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어서게 하시는 기적을 경험하실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주 오랜 이야기입니다. 황영일이라는 분이 육군 중령으로 제대를 하고 받은 퇴직금으로 대구 삼덕교회 집사님과 동업을 했다가 졸지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데리고 셋방살이로 가게 되었고 그 당시 육이오 바로 직후여서 나라에 많은 산업도 없었던 때라 취직도 하지 못하고 서울역에서 지게를 지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황영일집사님은 오늘 삼천환만 벌 수 있도록 해 주십사 기도하고 나왔는데 그 날이 24일 성탄 이브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어렵게 60환을 벌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배당 종소리가 들려 그 교회로 성령님이 강하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목사님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불우이웃을 돕는 헌금을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십 환밖에 없는데 이 돈으로 조금의 쌀이라도 사서 죽이라도 쒀서 먹어야 되는데 그런데 마음 속에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영일 집사님은 모르겠다 바치고 보자 바치고 나니까 웬 은혜가 쏟아지는지 눈물이 덩달아 쏟아지고 울면서 간절하게 한 시간을 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이 조용합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가보니 호롱불에 성경을 보던 아내가 엎드려 잠이 든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성경이 적셔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남편의 기척에 잠이 깬 아내가 밥상을 들고 들어옵니다. 웬 쌀밥입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4학년 딸아이가 학교에서 강냉이 빵을 주길래 동생 생각이 나서 주려고 달려오다가 가파른 낭  떠러지에 떨어져 다치게 되니까 이 사실을 알고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금을 해서 돈 육천 환과 쌀 두말을 가지고 선생님과 딸아이 친구들이 왔다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황영일 집사님은 엉엉 웁니다. 바로 그때 누가 방문을 두드리는데 아까 예배드렸던 교회의 권사님이 들어옵니다. 그 권사님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교회에 들어와서 헌금을 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도우라는 감동이 있어서 당신을 쫓아왔고 그리고 문밖에서 당신 두 부부가 하는 소리를 모두 들었습니다. 하면서 아이 치료하는데 쓰라고 삼만 환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남편이 동성방직회사 사장인데 그곳에 당신의 일자리를 한 번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느냐 묻습니다. 육사를 나와 중령으로 예편을 했다고 하니까 권사님이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중령으로 제대한 분이 지게를 지느냐고 그래서 그길로 취직이 되어 나중에는 황영일 집사님이 그 회사에서 상무까지 되고 그 가정이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 잘 믿는 가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시체 같은 환경에 대하여 주를 믿고 기도함으로 일어나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은 시체를 일으켜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주변에서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시체같은 것들 소망이 없는 것들을 향하여 외치시지 않겠습니까?
죽은 시체와 같이 소망이 없는 000아! 일어나라!
일어나 앉는 역사가 우리의 외침처럼 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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