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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설교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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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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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0-09-25 00:00    조회 4,346    댓글 0  
 
사도행전7:54~60절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자니라”    2010. 9. 26
54절을 함께 읽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을 통하여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행2:3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베드로를 향해서 반대로 회개할 기회를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어째서 같은 복음을 듣고 이처럼 다르게 나타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분명한 이유는 완곡한 표현과 강한 표현으로 말미암아 이런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사도행전2: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이란 부드럽고 완곡한 표현을 베드로는 사용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7장 51절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도다”
52절에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스데반의 표현은 베드로의 표현과 차이가 있음을 봅니다. 베드로의 부드러운 표현과는 다르게 스데반의 표현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 너희가 너희 조상처럼 의인을 잡았고 죽인 너희가 바로 살인자다” 아주 강한 표현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드러운 지적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강한 지적은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화가 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부부끼리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에 사이를 멀게 만드는 원인이 바로 말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데도 길게 하느냐 짧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잘했다 짧게 하면 잘한 것이 되지만 잘~ 했다하면 못했다고 비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뒤말 끝을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행복해 같은 행복해인데도 행복해 ∠ 끝을 올리니까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언어폭력으로 부부의 사이를 내고 맙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특허 대학 학장인 사토 도미노도 자신의 저서인 “거울 앞에 외쳐라”에서 언어의 습관만으로도 인생이 바뀐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저서에 보면 긍정적인 사고로 긍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긍정적인 사고는 긍정적인 말의 습관 즉 긍정적인 말버릇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 긍정적인 말의 습관은 결국 얼굴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호감 가는 얼굴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국내 최초로 인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원광디지털대학의 주선희교수는 아침에 일어날 때 행복하다, 복된 하루가 시작되겠군, 나는 정말 축복 받은 사람이야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에 맞는 파동이 생겨서 생각과 행동이 바뀌고 습관이 변하고 인격이 달라져 결과적으로 인상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복음을 듣고 부드럽고 좋은 말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니까 얼굴 표정부터 관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바라보면서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나이키, 와이키키, 위스키
자! 이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스스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복음을 듣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도 남을 통하여 네가 바로 그 문제의 사람이야 라고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우리는 몹시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고 죽고 싶고 창피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의 경중에 따라서 또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백 마리 양을 가진 부자가 한 마리 양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그것으로 부자는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대접했다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다윗이 세상에 그런 못된 놈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을 때 나단 선지자의 말이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요 라고 왕인 다윗에게 선지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적을 받고 이를 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음에 찔려 자신이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것을 회개하고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런 면에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57절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귀를 막은 채로 야! ~ 달려들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적한 사람을 향하여 분노하고 미워하고 59절에 돌을 들어 공격하였습니다. 이것은 은혜 받지 못한 교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하고는 다르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 속에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러나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이 그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내가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나를 지배하면 내 생각, 내 주장, 내 계획, 내 자존심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내 생각 아닙니다. 내 계획 아닙니다. 내 자존심이 없습니다. 내가 없습니다. 세상도 없습니다.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5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충만하니까 스데반은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지금 스데반은 세상의 조건으로는 최악입니다. 그러나 최악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최상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성령충만하게 되면 스데반처럼 최악의 환경에서 최상의 환경으로 살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질병으로, 실패로, 마음대로 안 되는 일로, 계속되는 시련으로 ......
우리에게 어떤 최악의 환경이 존재합니까? 그러나 이 속에서 찬양이 나오고 감사가 나오고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성령충만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성령충만한 사람은 땅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봅니다. 땅을 바라보면 실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실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 쳐다보면서 살고 예수 바라보면서 살아서 무엇이든지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어떤 것도 견디며 승리하시는 성령충만한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그가 하늘로 올리워 가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보좌 우편에 예수님이 앉아계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스데반을 가만히 앉아서만 보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셨습니다. 스데반에게 말은 하시지 않으셨지만 예수님의 이 모습만으로도 스데반은 모든 것을 견딜만한 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위급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위로해 주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 것을 보면서 힘을 내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뱀잡이 수리는 높은 상공에서도 움직이는 쥐나 뱀을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려와 먹이를 낚아채서 먹어치우는데 먹는 중에 맹수가 나타나 습격을 받게 되면 뱀잡이 수리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날 생각을 잊고 혼신을 다해서 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잡혀 먹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날아오르면 간단한 것을 잠시 날개가 있음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의 건망증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 어떤 순간에도 잊지 맙시다. 우리를 위하여 일어서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아멘이십니까?
그리고 스데반은 이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자신의 영혼을 넉넉히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던져 치는 자들까지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작지만 스데반은 영적인 거인으로 살다가 하나님께 간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간 스데반처럼 우리도 주의 위로로 살아갑니다. 주의 위로가 있기에 우리도 우리의 영혼을 넉넉히 맡길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우리도 우리를 향한 주의 위로가 너무나 크고 소중한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들은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영혼을 주께 맡긴 채로 용서하며 살다가 가는 영적인 거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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