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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설교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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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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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0-05-15 00:00    조회 4,670    댓글 0  
 
사도행전4:8~10절     “이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섰다”     2010. 5. 16
중국과 북한은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가깝다 중국은 북한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 사이는 이 정도다 하는 동맹국의 우의를 유감없이 과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 핵융합을 성공시켰다는 북한의 보도에 대해서 중국 언론은 일제히 보도하기를 핵 가지고 게임하지 마라 중국 중앙정부의 매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아주 묘한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갈등하는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 함께 하는 것 같으면서도 갈등하는 두 파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와 오늘 본문에는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같으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는 부활을 이야기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바리새파는 슬그머니 빠져 보이지를 않는 갈등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인 바울도 이런 공존과 갈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내 지체 속에서 또 다른 법이 있어서 죄를 짓도록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공존과 갈등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기를 롬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앙, 성령으로 행하려는 마음과 육신의 생각대로 살려는 마음, 기도하려는 마음과 핑계 대는 마음, 봉사하려는 마음과 무관심하려는 마음, 제대로 믿고자하는 마음과 거부하는 마음이 함께 우리 마음에 공존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 본문의 사건의 중심부로 들어가 봅니다.
사두개인들은 지금 놀라운 일을 보았습니다. 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사람을 이렇게 되게 만든 사람들을 눈으로 분명 보았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 베드로의 놀라운 설교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두 사람이 어부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보통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도 제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식하기는 매 한 가지라고 여겼습니다. 예수의 직업은 목수였으니까 어부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놀라운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마7:29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았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고 무식한 자가 분명한데 전혀 무식하지 않은 도리어 많이 배운 권위 있는 자와 같았고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남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는 행2:37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하였고 행4:13절에 “본래 학문이 없는 무식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니까 이상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본래는 무식한데 무식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들 마다 마음에 큰 감동이 밀려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반응했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이르되” 2장4절에는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힘이 있게 느껴집니다. 권세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인가가 분명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예수교를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3천명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행각에서 병 나은 사람을 옆에 두고 설교할 때도 예수교를 싫어했던 이천 명의 사람들이 역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구원의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 충만 받은 한 사람으로 이런 놀라운 결과를 갖게 한 것입니다.
구원 받은 오천 명의 성령 충만 받은 사람들은 단지 듣고 예수 믿는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였습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서로 애찬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정도라면 사두개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도 예수 믿고 성령 충만 받자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3절에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성전을 맡은 자들 모두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그들이 40여세 된 앉은뱅이를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서 매번 구걸하는 사람이니까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이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온 것이냐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보다는 3절에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어 버렸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사두개인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신앙을 힘 있게 권세 있게 하는 것이 성령이 충만할 때요 우리의 속과 겉을 진정으로 변화 시켜 주의 일 하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신 것을 알면서 사두개인들이 요한과 베드로를 옥에 가두듯이 성령 충만을 가두어 버리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5:16~17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을 가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두개인들은 성령을 가두는 자의 상징입니다. 성령을 가두는 자는 육신대로 사는 자요 그들이 보는 것은 잘 믿는 사람들의 문제점이나 꼬투리만 바라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런 일에 쓸 시간이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전하고 주의 일하는데 힘 있고 권세 있고 속과 겉이 변화 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부활의 문제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라는 말이 듣기 싫은데 사도들이 부활을 외치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도무지 자신들의 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면 되는 것이지 내세는 무슨 내세냐 더욱이 부활이라니 사두개인들의 부활이 없다는 기본교리에 도전하고 있는 사도들의 부활외침이 귀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가문으로 이루어진 사두개인들이 모여서 사도들을 세워놓고 너희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의 권세로 부활을 외치느냐는 것입니다. 죽으면 소망이 끝이다 죽으면 그만이지 부활은 없다는 것이 사두개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기도 하고 우리들도 때로는 이런 불신앙적 믿음을 갖기도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굴로 된 무덤이라 돌로 문을 해서 장례를 마쳤습니다. 장례를 치른 다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여기서 그 누구도 심지어 마리아와 마르다까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뒤 바침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도록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어서 오세요 나사로의 시신을 넣어둔 무덤으로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는 말씀에 못 이겨 예수님을 나사로의 무덤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아직까지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은 선 뜻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하기보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시체가 상하는 냄새가 나니 부질없는 명령 말라는 뜻을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못해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이번에는 죽은 자 나사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 자는 산자들과는 다르게 추호의 미적거림도 없이 온 몸을 베로 동인채로 일어서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생명의 주인이신 그의 권세로 죽은 자가 다시 산 것입니다.
베로 동인채로 걸어 나오는 나사로를 보고 아무도 달려가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수건을 벗겨 내거나 동여져 있는 베를 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일어나 걸어 나오는 순간 누군가가 기뻐서 달려갔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예수님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그제서야 사람들이 움직였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 이제 희망은 사라졌다 그래서 끝이다하는 저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안목과 고정관념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죽은 나사로는 무덤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무덤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전신이 묶여 있는 소망 없는 모습으로 누워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권세로 이루어지는 부활이 분명히 있는데도 말입니다. 앉은뱅이를 성전에서 일하면서 줄곧 보아왔음에도 정말로 나아서 서 있는 부활신앙의 능력을 부인하여 가두어 버리는 사두개인처럼 되면 아니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놓여 진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사두개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도저히 안 되겠습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두개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희망에 찬 부활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10절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아멘?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는다고만 생각했던 그 고정관념을 부활신앙으로 죽었다가 다시 사신자의 이름이 그 권세가 사십 년 동안 한 번 도 서보지 못했던 앉은뱅이를 지금은 너희 앞에 서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성령 충만과 부활 신앙을 가두어 버렸고 고정관념과 좁은 안목으로 세상만 바라보는 불신앙의 상징입니다.  
성령 충만과 부활 신앙이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대안인 것을 알고 우리의 틀 안에 가두어 두지 말고 사용해서 힘 있고 권세 있는 신앙인들 죽은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복들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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