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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0:1~12절 “슬픔이 변하여 춤으로 베옷 대신 기쁨의 옷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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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0-04-16 14:02    조회 7,452    댓글 0  
 
시30:1~12절      “슬픔이 변하여 춤으로 베옷 대신 기쁨의 옷으로”    2020.4.19.
시30편은 다윗이 지은 시라는 걸 알 수 있고 이 시를 성전 낙성식 때 사용되었다고 해서 ‘성전낙성가’라고 표제에서 소개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럼 낙성가로 쓰여 진 다윗의 시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1절을 볼까요.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기서 다윗 자신이 여호와를 찬양할 수  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하지요 그 하나는 주께서 나를 끌어내셨다는 거고 또 하나는 주께서 대적들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 ‘끌어내다’ 히브리어 ‘딜리티니’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다’는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그 당시 다윗이 깊은 구덩이와 같은 상황에 있었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끌어내셨다는 거고 그런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가 된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심마흐타’는 ‘기뻐하다’거든요 그런데 ‘웰로’ ‘못하게’가 합쳐서 ‘웰로심마흐타’ ‘기뻐하지 못하게 하다’가 된 거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다윗이 깊은 웅덩이에 빠져 위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놈 잘 됐다’고 원수들이 기뻐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위기에서 건져주심으로 원수들이 더 이상 기뻐할 수 없도록 만드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라는 겁니다. 2절을 보세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고치셨다’ ‘라파’잖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깊은 웅덩이에서 건져 냄이 뭔지를 알려주지요 ‘육체적 질병’이지요 병든 육체로 인해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처럼 절망적일 때 다윗이 먼저 한 일이 ‘내가 주께 부르짖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출15:26절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는 말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짖은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이 경험한 것이 뭡니까? 하나님이 질병의 자리에서 그냥 끌어내신 것이 아니라 고쳐서 끌어내셨다는 겁니다.
3절을 볼까요.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상황이 어느 정도였다는 겁니까? ‘스올’ 마치 지옥과 같았다는 거 아닙니까? 전 심방하면서 아픈 환자를 대할 때가 있는데 아픔의 정도가 아주 큰 성도는 얼마나 참기가 힘들면 이런 고통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씀을 하는 걸 듣게 되지요 참을 수 없는 고통인데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곳이 지옥이잖아요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시지 왜 아직 일까요? 다윗이 겪고 있는 것도 이와 같았다는 거거든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받으시고 이런 지옥구덩이 같은 육체적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낫게 하신 걸 히브리어 ‘히이타니’ ‘나를 살리셨다’거지요 진짜 죽었다가 산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거의 죽다시피 했다가 소생되어짐을 말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다윗은 1절에선 ‘끌어내셨다’ 2절에선 ‘고치셨다’ 그리고 3절에선 ‘살리셨다’고 하잖아요. 다윗뿐만이 아니지요 고통 중에 기도하는 우리를 끌어내실 거고 고치실 거고 살리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신앙의 사람이 아니라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중한 질병에 걸렸던 것이 아니잖아요 신앙인이라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질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던 거고 신앙인이라서 다른 것이 뭡니까? 지옥 같은 고통의 구덩이에서 끌어내시는 하나님, 죽을병도 고치시는 하나님, 그리고 죽음의 직전에서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할 때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4절을 볼까요.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끌어내시고 고치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던 다윗이 이번에는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향해서 찬송하라고 하잖아요. 여기 ‘주의 성도들’ 히브리어 ‘하씨다이우’ 어디서 파생된 단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인 ‘헤쎄드’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거고 그러므로 주의 성도가 누구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아니냐는 거지요
우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인 ‘하씨다이우’ ‘주의 성도’들인 겁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을 우리 또한 동일하게 끌어올리시는 하나님, 고치시는 하나님, 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말씀하잖아요. 우리 주의 성도들에게 경건한 신앙의 근거가 뭔가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는 거지요 레11:45절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뭡니까? 이스라엘백성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리고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 그리고 광야에서 그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 거룩하심에 조금도 변함이 없으시다는 거지요 다윗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주의 성도들에게 감사하라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끌어내시는 하나님이시오 고치시는 하나님이시오 다시 살리시는 그 변함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잖아요. 그 옛날 구약의 선지자들이 등장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외친 것이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거 아니었습니까? 사44:21절에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날 만드신 하나님, 날 종이라 부르시는 하나님, 무응답의 시간 속에서도 결코 날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할렐루야! 사46:9절에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구원하신 옛적 일을 기억하랍니다. 예전에 어려울 때 아플 때 쓰러졌을 때 힘들어 괴로울 때 날 구원하셨던 그 하나님 또 끌어내실 거고 고치실 거고 살리실 하나님을 기억하자고요 5절을 보세요.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여기 ‘노염’ ‘뻬압포’는 ‘콧구멍’을 의미하는데 ‘화가 나서 코로 호흡이 이뤄지는’ 분노를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거지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시잖아요 이 분노하심은 잠깐이랍니다. ‘잠깐’ ‘레가으’는 ‘눈을 깜빡거림’처럼 순식간이라는 의미거든요 반면에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이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위기의 순간을 지날 때 기억할 것은 지금 나는 실패의 때를 지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때라는 것과 가난케 하심이 아니라 도리어 주의 것으로 풍성케 하시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전엔 어찌 살았답니까? 6절에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기 ‘내가’ 히브리 대명사 ‘아니’로 시작되고 있지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뭐라고 했답니까? ‘영원히 흔들리지 않아’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아니지요 형통할 때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던 은혜의 시간들이었던 걸 교만하게도 ‘내가’ 했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 잘 될 때 조심하자고요 내가가 아닙니다.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 일 없을 때 더 기도의 끈을 붙잡고 사시는 분들이 되세요? 내가 아니에요 우린 항상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가 놀랍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분들이 되자고요 그래서 다윗도 7절에 고쳐서 고백하잖아요.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나를 산처럼 굳게 세우신 분이 누구에요?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근심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다윗이고 성도로 부르는 우리들 아닙니까? 그러므로 ‘나여’했던 다윗이 ‘여호와여’로 급 수정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 배울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절을 볼까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다윗은 ‘나여’ 할 때 경험한 것이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었고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외면하고 계시다는 거거든요 다윗은 이러한 때 ‘간구했다’는 거지요 여기 ‘간구하다’ ‘에트한난’은 ‘몸을 구푸리다’니까 절박하게 매달렸다는 겁니다. ‘부르짖다’와 같은 의미를 반복한 거지요 그렇다면 다윗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는 거거든요 세상은 마귀가 원하는 것을 주로 하게 하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뿐이지만 여기서 유일하게 해방되는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인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 9절에 다윗이 뭘 기도하고 있습니까?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내가 죽는다면 죽은 생명이 무슨 하나님께 유익이 있겠나요 그래도 살아야 주를 찬송할 수 있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음이요 내 육체의 생명이 약해지고 힘들어지고 고통이 심해질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주를 찬송하고 주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하시자고요 가장 절망적일 때가 우리 하나님께 매달릴 때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숨지면 못합니다.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10절이지요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여기 ‘들으시고’ ‘솨마으’는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걸 포함하는 단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솨마으’ 들으심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잖아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또 ‘나를 돕는 자가 하나님이심을 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거지요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여기 ‘나의 슬픔’ 우리말로는 슬픔의 정도를 파악할 수 없잖아요 그러나 슬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쓰페디’는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고 창자를 끊어내는 몸부림치는 통곡’의 의미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바꾸세요? ‘춤이 되게’ 뭡니까? 머리부터 양팔과 두 다리 모두 움직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큰 기쁨의 표현이란 거지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 되게 하는 능력이 간구하는 자 부르짖는 자가 받을 축복인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베옷’이라면 ‘통회하는 다윗’이었다는 거잖아요 이 베옷이 기쁨으로 띠를 한 기쁨의 옷으로 바꾸어 입히셨다는 거지요 띠는 그 당시 세마포처럼 생긴 통짜로 된 옷을 입을 때 맨 마지막 순서로 허리에 띠를 두르거든요 그렇다면 부르짖음과 간구의 마지막 결과가 슬픔이 사라지고 대신 기쁨으로 채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구나. 여기 다윗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마지막 결단을 이야기하는 것이 12절이라는 거지요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의 결단 세 가지가 뭐에요? 첫째는 잠잠하지 않겠다는 것과 둘째로는 주를 찬송하겠다는 거고 셋째로는 주께 영원히 감사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신앙이 거저 된 게 아니지요? 죽음직전에서와 육신의 고통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창자를 끊어내는 것 같은 인생의 가장 큰 슬픔에서 부르짖음과 간구로 얻은 신앙이잖아요 그러므로 성도의 위기는 그냥 위기가 아니라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을 알고 우리 모두 이럴 때 기도하고 부르짖고 간구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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