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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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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3:4~6 “예수님으로 다윗의 노래가 내 노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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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0-02-13 18:38    조회 6,348    댓글 0  
 
시23:4~6      “예수님으로 다윗의 노래가 내 노래가 되었습니다”    2020.2.16.
‘예흐와 로이’ ‘여호와 나의 목자’로 시작되는 본 시편에서 ‘로 에흐싸르’ ‘부족함이 없습니다.’랍니다 양은 까탈스러워서 웬만 하면 눕지 않는다네요. 그런데도 그냥 푸른 풀밭이 아닌 그늘이 있는 푸른 풀밭을 만나면 까탈쓰러운 양도 달라지는데 바로 그런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여호와’라는 거지요

4절을 볼까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답니다. 2절에서 소개되고 있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하고는 매우 반대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만 푸른 풀밭이라도 구름 한 점 없이 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태양열에 노출되어 있다면 낮의 해가 충분히 양들을 상하게 할 거라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 양들에게는 목자가 있었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늘 져 있는 이상적인 초원인 푸른 풀밭으로 인도되었다는 거지요 잔잔한 물가는 어떤 곳인가요? 맹수도 물을 마시기 위해서 찾아오는 곳이지요. 결코 목자가 없다면 안전한 곳이 아닌 겁니다. 목자가 없었다면 세상은 그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이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목자가 있으니까 푸른 풀밭이고 쉴만한 물가라는 거 아닙니까?
이번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랍니다 히브리어 ‘찰르마웨트’는 ‘죽음의 그림자’요 ‘죽음의 그늘’이라는 의미거든요 이런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 여기서 다윗이 경험한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을 지나는 경우를 또 만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예전에 죽을 만큼 어려웠던 일들을 겪으면서 그 때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뭡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거거든요 만약 또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난다면 역시 이길 수 있는 것이 뭡니까? 또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거라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한 번 겪었던 경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어렵고 힘든 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소중한 영적자본이 되는 지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히브리원문은 ‘키 앗타 임마디’인데 ‘키’ ‘왜냐하면’ 이유접속사지요 ‘주께서’ ‘앗타’는 원래 ‘당신’이거든요 존경심과 친밀감이 있는 단어라는 거지요 그리고 ‘임마디’는 ‘곁에’ 또는 ‘가까이’ ‘더불어 함께’ 거든요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만 전엔 어땠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시22: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었다는 거지요 그랬던 그가 ‘예흐와 로이’ ‘여호와 나의 목자’로부터 뭘 경험했나요? ‘예쇼베브’ 소생함이잖아요. ‘영혼의 소생함’ 이후로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시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저도 제가 겪은 수많은 고통들 가운데서 경험한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었거든요 만약 다시금 또 그런 큰 고통의 자리에 들어선다 해도 제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제게 이루어진 신앙의 토대지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
또 여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양을 돌볼 때 양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바로 그 지팡이와 막대기를 말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까 하나님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인도하실 거고 지켜주실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지팡이와 막대기는 서로 다른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한 개지만 지팡이와 막대기를 이야기함으로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보다 더 생생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겁니다. 지팡이와 막대기의 용도는 인도하려는 용도이기보다는 악한 짐승의 세력으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을 거라는 거지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 여기 ‘주의 보호’는 우리 삶의 모든 곳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늘 없는 푸른 풀밭에서 장시간 있으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그늘이 있는 푸른 풀밭을 찾아 자연재해로부터 지켜내 주시고 쉴만한 물가는 목마름과 더불어 역시 맹수들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거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선 뭡니까?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거잖아요 무엇으로?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나의 목자 되시는 여호와는 우리를 위해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위험과 삶의 위기로부터 건지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안위하신다’ 히브리어 ‘예나하므니’는 ‘위로하다’ ‘동정하다’ ‘안심시키다’라는 의미거든요 낮이나 밤이나 끊임없는 맹수의 공격에 목자의 목숨을 건 지킴처럼 ‘예흐와 로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은 바로 여호와가 보호하심으로 양인 주의 백성들이 안심한다는 거고 커다란 위로가 된다는 거지요

5절을 볼까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 ‘내 원수’ 히브리어 ‘초레라이’는 ‘나를 적대시하는 자’ ‘나를 괴롭히는 자’라는 의미로 다윗을 지속적이고 공격적으로 괴롭혔던 모든 자들을 말한다는 거지요 바로 그 내 원수가 보고 있는 맞은편에 상을 차려주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다윗의 승리를 알리는 축제의 현장을 원수들도 보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는 하나님이 다윗이 옳았다는 걸 선언하시는 거잖아요 시22:7~8절에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이처럼 비웃었던 원수들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승리의 상을 차려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기 이 모습에서 뭘 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에겐 너희가 틀렸어 그리고 다윗에게 네가 의뢰하고 의뢰했던 네 믿음이 옳았다고 의로운 재판을 해주셨다는 거지요 여기 ‘상’ 히브리어 ‘슐르한’은 손님 대접하는 식탁을 말하거든요 ‘차려주시고’ 랍니다. ‘한 상 잘 차렸네’ 그러잖아요. 바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축하하는 식탁을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한 상 거하게 차려주셨다는 거지요 시22:19절에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이랬었는데 ‘예쇼베브’ 소생시키신 거지요 회복시키신 거고 새롭게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흐와 로이’ 목자로 삼은 자들에게 반드시 이런 날이 온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22:4절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이게 바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심이잖아요. 우리 모두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뢰하여서 하나님이 위기에서 건지셨어, 도와주셨어, 승리하게 하셨어, 고쳐주셨어 원수의 목전에서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지켜보던 모든 이들 보는 그 앞에서 거하게 상을 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뭡니까?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랍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아주 귀한 손님에게는 그 집의 종들이 값비싼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다는 거지요 뭐가 생각나나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그 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게 내려오던 전통이요 풍습의 하나였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그 당시 이 기름을 보통 그 집의 종들이 발라주는 것을 오늘 본문엔 누가 다윗의 머리에 부어주셨다고 말합니까? ‘예흐와 로이’ 목자이신 여호와시라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다윗을 극진히도 대접하셨다는 거지요 예를 들면 국빈 영접 할 때 미 국무장관이 나가서 맞이하는 것하고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는 것은 받는 입장에서 예우의 차원이 다르지요 대단한 예우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여호와가 누구십니까?’ 시22:28절에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다윗의 머리에 직접 기름을 부었다는 건 다윗을 그만큼 매우 존귀하게 여기셨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의 고백이 뭔가요? ‘내 잔이 넘칩니다.’ 히브리어 ‘레와야’는 그냥 채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뭡니까? 잔을 차고 넘쳐흐르게 하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여호와 나의 목자’ ‘예흐와 로이’입니까? 그렇다면 다윗처럼 순종하고 의뢰하며 따른다면 우리에게도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믿음으로 산 네가 옳다고 손을 들어 주실 거고 우리의 잔이 넘쳐흐르는 풍성함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절을 볼까요.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 ‘내 평생’은 ‘내가 생명이 있어 숨 쉬는 날까지’거든요 내 평생에 확신 하는 것이 뭐랍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 한다는 거지요 ‘선하심’ ‘토브’는 ‘좋은’ ‘아름다운’ 또는 ‘친절한’이거든요 우리가 우리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친절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요15:15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택하시고 찾아오시고 손 내밀어주신 친절이 다윗만이 아니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그 친절 ‘토브’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함께 하는 것이 뭐랍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한다는 거지요‘인자’ ‘헤쎄드’는 ‘사랑하심’ ‘긍휼히 여기심’이거든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전엔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잖아요 원래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자였었잖아요. 그래서 성경 엡2: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하고 엡2:1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정죄 되었었던 우리였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 ‘헤쎄드’가 있는 자가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엡2:4~5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헤쎄드)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자요 사랑인 헤쎄드잖아요.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인해서 마귀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으며 멸망 받을 운명이었던 우리가 저 천국을 소유하고 하늘나라 갈 때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시민으로 사는 자 된 것은 우리 안에서 예수 십자가로 발견되는 ‘헤쎄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집을 말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영원히 살 것이라는 거지요 여호와의 집은 먼저는 하나님의 성전을 말함이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사는 삶을 말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 하나님이 주인 되어 다스리는 여호와의 집에서 하루 이틀이 아닌 영원히 거하는 것이 우리의 꿈인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고 달라진 것은 하나님을 주로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그 분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 그리고 지키심과 보호하심으로 사는 것을 참 복으로 안다는 거잖아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집에서,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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