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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2:21~35절 “나귀도 보는 하나님사자 사람이 못 봐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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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4-04-26 00:00    조회 5,303    댓글 0  
 
민수기22:21~35절  “나귀도 보는 하나님사자 사람이 못 봐서야” 2014. 4. 27
나귀가 말을 하는 참으로 희귀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침 일어나자마자 발람선지자는 모압왕을 만나기 위해서 나귀에 안장을 지웁니다. 모압에서 크고 존귀하게 해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는 모압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발람선지자는 이런 허망한 것을 소유하려는 의지력 때문에 사리판단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는 안 되는 길을 나선 것입니다. 나귀를 탄 발람선지자 일행이 좁은 길에 들어섰을 때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가 좁은 길목을 막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발람선지자도 선지자를 따르는 두 종도 모압의 고관들도 이 모습을 못 보는데 나귀가 보고 옆 밭으로 피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발람선지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어! 나귀가 왜 이러지
발람선지자는 영문을 모르니까 채찍질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좁은 길로 들어섰는데 이번에 좌우가 막힌 골목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서 있습니다. 나귀가 놀라서 옆 담으로 비켜서니까 담하고 나귀 사이에 발람선지자의 발이 찡겨버렸습니다. 발이 상처를 입게 되자 너무나 아픈 나머지 발람선지자가 화를 내면서 나귀를 채찍질을 합니다.
나귀는 조금 더 나아가서 이번엔 아예 옆으로 피할 수조차 없는 골목을 지나게 되고 앞에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가 죽이려 합니다. 그러니 이리도 저리도 피할 수 없는 나귀가 그냥 무릎을 꿇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꼼짝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움직였다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걸 모르는 발람선지자는 이 나귀가 미쳤나 하면서 지팡이로 나귀를 세 번 내리칩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여신 겁니다. 참으로 희귀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귀의 말이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나를 세 번이나 지팡이로 치느냐”
발람이 나귀가 말에 대답합니다. “네가 지금 내 말을 안 듣지 않느냐 그러니 때렸지 내가 괜히 때렸겠니 내손에 칼만 있었어도 넌 죽었어”
이 말에 “내가 지금까지 당신 말 듣지 않은 적이 어딨었냐” 발람이 이 말을 인정하는 말을 합니다. ‘그랬지’
이때 하나님께서 발람선지자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시니 그제서야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가 보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는 말이 “나귀가 피하지 않았다면 너는 내 칼에 죽었을 것이고 나귀는 살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발람이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당신이 막아 섰는 줄 알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라 가긴 가지만 절대로 내가 시키는 말만 해야 한다” 그래서 발람이 모압왕에게 가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발람선지자가 오늘 날 우리와 상관이 없는 사람일까요?
크고 존귀하게 되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앙인으로서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을 가려는 마음이 발람선지자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에겐 없나요 발람이란 이름이 히브리어로 “백성을 삼키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람은 크고 존귀하게 되어 지고 마음먹은 대로 얻을 수 있다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신이 멸망으로 삼켜 버려진다 해도” 하나님 신앙과 기꺼이 바꿀 것처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영안이 어두워짐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영음을 듣지 못함도 너무도 당연합니다. 발람선지자가 자신의 명예와 욕심을 위해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엔 영안도 영음도 모두 열려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선지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6절 하반절입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은 줄을 내가 앎이니라.” 발람선지자는 신령했습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그런 발람이 세상의 허영과 욕심에 빠지면서 나귀가 보는 하나님의 사자조차도 볼 수 없는 영안이 멀고 신령한 귀가 막히는 자신의 신앙을 삼켜 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자신만 삼키면 다행이잖아요. 민31:16절입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다른 사람까지 망하도록 삼켜 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신령한 믿음과 은혜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10:38절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왕이면 신령한 모습을 잃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서 나도 살고 가정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육신의 눈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남극의 섬에 펭귄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뭡니까? 그 많은 펭귄들 사이에서 자기 새끼들을 알아본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볼 땐 그놈이 그놈 같은데 어떻게 자기 새끼를 알아보는지 아십니까? 펭귄들만이 가지고 있는 눈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냄새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주파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신령한 눈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신령한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 신령한 눈으로 우리 자녀를 보고 우리 가정을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희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말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가 288장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2절입니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3절입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육신의 눈가지고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성령과 피로써 거듭난 믿음의 사람이 되어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되니 하늘의 영광이 보이게 됩니다. 주님이 널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나와 세상은 보이지 않고 구속하신 예수님만 보입니다. 이것이 뭡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고 우리를 이렇게 복 주신 구주 예수님을 끊임없이 찬송해야 하는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술에 취한 눈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듯이 세상욕심에 취한 눈이 신령한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신령한 자가 타락을 하니 나귀도 보는 것을 보지 못함을 보면서 지금 현재 믿음의 눈과 귀를 가진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젠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는 자들이 되자!
이젠 나와 세상이 아닌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들이 되자!
이렇게 되려면 하고 싶은 말만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듣고 싶은 말만 들어서도 안 됩니다.
오늘 35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 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기를 원했던 발람선지자에 대해서 훗날 베드로사도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벧후2:15절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므로 듣고 싶은 말만 들었고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고 말입니다.
야고보의 아들 되는 다대오라 불리우는 유다도 유다서1:11절에 발람의 길은 어그러진 길이었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 어그러진 길로 가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나귀가 길이 아닌 밭으로 들어갔을 때 주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나귀가 자신을 아프게 했을 때 주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으려했어야 했습니다. 나귀가 입을 열었을 때 세상의 욕심과 자신을 내려놨어야 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을 때 고관들과 함께 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가던 길이 막힐 때 하나님을 보려고 엎드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더욱 더 주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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