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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8:31~38절 “예수님을 따르는 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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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3-04-27 00:00    조회 6,185    댓글 0  
 
막8:31~38절             “예수님을 따르는 자란?”          2013. 4. 2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역사적으로 몇 안 되는 유럽정벌을 이루었던 황제였습니다 마는 그런 그가 패전 후에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음을 맞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최강의 무기와 군인들로 나의 평생을 싸웠으면서도 세계를 정복하는 일에 실패하였는데 예수는 단 3년 만에 사랑하나로 세계를 정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에게 바로 이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그 답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14:21절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데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누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킬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랍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24절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누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랍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입으로 또 그의 진실 된 의지력을 바탕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굳은 의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던 그가 막상 예수님이 잡혀서 고초와 고문을 받는 현장에선 달라졌습니다. 예수와 한 패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을 난 모릅니다.”라고 세 번 연거푸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에 굉장한 차이가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 오셨던 전시몬선교사님도 북한에 성경을 나르는 일을 하다가 북한 보위부에 끌려가서는 살려달라고 울면서 울부짖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해가 갑니다. 그랬던 그가 주님이 날 위해서 자신을 주셨건만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것인지 서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눈물이 나오고 울음이 터지면서 회개로 바뀌고 그렇게 회개하면서 또 얼마나 회개할 것이 많은지 회개의 역사가 이루어지니까 강하고 담대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실전하고는 너무나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 모습입니다. 전시몬 선교사님과 함께 오셨던 연변의 학교 교장선생님도 전시몬 선교사님과 함께 성경 보급하는 일을 했었는데 전시몬 선교사님과 북한 보위부로 같이 잡혀 들어가서 고문을 받는데 벽에서 30센티 떨어져 세워놓고는 벽에라도 대면 두둘겨 패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두둘겨 패고 그렇게 18일 동안 먹이지도 재우지도 않는 고문을 당하는데 양쪽에 지키는 군인들이 조는 동안 잠깐 벽에 몸을 기대는 것이 그렇게도 편하고 행복하더랍니다. 그런 그가 18일째 돼서는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답니다. 그제서야 밥을 주기를 시작하는데 두부 한쪽 더 달라고 했다고 무지하게 맞았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과 연관된 사람들의 명단도 불지 않고 그래서 죽을 줄 알았는데 풀어주더랍니다. 그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자신을 혹독하게 고문했던 그 사람을 중국 연변에서라도 만나지 말기를 통일이 되어서도 만나지 말기를 왜 만나면 죽일 것 같아서라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주를 위해 고통과 고난을 받는 것 참으로 훌륭합니다마는 조금만 더 한 발자국만 더 가서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예수님처럼 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잘 되는 것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될 수만 있다면 비록 내가 해가되고 어려움이 와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본문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 깊은 병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반대에서 오는 병입니다. 처녀는 공주병, 총각은 왕자병, 중년 부인들은 왕비병이 있습니다. 중년의 남자들은 어떻습니까?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습니다. 뭐든지 남들보다는 앞서가는 것을 꿈꾸며 뭐든지 내가 해야 한다고 하는 황제가 되려는 병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가 최고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린 얼마든지 여기 이 모습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다르다는 거지요 예수님을 사랑하면 달라지잖아요. 그렇게 높이고 자랑하고 사랑하던 나를 부인하게 되고 십자가를 지고 있는 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에게서 그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베드로 그가 말하는 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이 말은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대속하기 위해 오신 분이지만 이 사실을 믿지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리스도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기는 싫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것과 따르는 것이 다른 것임을 그의 신앙 태도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번영과 평안은 원하지만 십자가 지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모습에서 이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를 향해 분명하게 신앙정립을 시켜주는 독일의 신학자지요 디트리히 본회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한 사람을 부르실 때는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있고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본문 35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무엇입니까? 말로는 믿는데 실제상황에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목숨을 위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목숨 때문에 버린 많은 것들을 소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김동명 목사의 사모인 안이숙여사가 일본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안이숙여사가 감옥에 들어오면서 감옥의 살벌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간수들은 수감자들에게 마구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편하게 되었고 수감자들은 서로 간에 인격적으로 대해 아무런 말썽도 생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안이숙여사의 주님을 따르는 신앙에서 감동되어서 나타난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안이숙여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쓰게 되었고 나중에 죽고자 했더니 사는 역사가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죽으면 살리라는 두 번째 책을 썼습니다.
번영과 행복과 성공을 위한 몸부림보다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가 할 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라고요?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부인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헬라어로 앞아르네오마이라고 하는 자기부인이란 말은 “NO라고 말하다.” 라는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자기에 대하여 NO라고 말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세상을 따라가는 자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십자가는 페니키아로부터 로마가 받아들인 사형법인데 십자가 선고를 받게 된 피고는 자기가 못 박힐 장소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스스로 운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십자가를 지다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이 운반하면서 받는 고통과 길에서 사람들로 구경거리가 되어 받는 모멸감 그리고 혹독한 멸시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헬라어 아콜루테오라는 따른다라는 말은 원래 같은 길을 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뭘 다 이루었다고 하는지 예수는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인 것 같아서 고개를 갸우뚱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오늘 날 세상에 믿는 모든 이들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의 역사가 우리 믿는 자들에겐 큰 복음이고 기쁨이고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이 주일이면 교회당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돌리고 모든 무릎은 예수의 이름에 꿇어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포기 하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모든 자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이로 세움을 받으셨습니다.
가정에 평화도 부부간에 화목과 이웃 간에 좋은 관계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NO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소까지 운반해 가는 그리고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어갈 때 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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