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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9:36~37절 “어린이 마음은 너무나 순수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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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3-05-04 00:00    조회 6,016    댓글 0  
 
마가복음9:36~37절       “어린이 마음은 너무나 순수해요”    2013. 5. 5.
둘째 외손주에게 자주하는 물음입니다. “우리 민현이는 왜 그렇게 이쁜거야?” 그러면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예수님 닮아서요” 주일학교에서 그리고 부모가 말해준 것을 그대로 믿는 데서 온 대답입니다.
이번엔 손녀 딸 이야기를 해봅니다. 작년 가을에 한창 도토리들을 많이 주울 때에 도토리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토리 묵 해먹으면 맛있겠다.” 그랬더니 손녀 딸 하윤이가 하는 말이 “도토리는 주우면 안 돼요 다람쥐 밥인데 다람쥐는 뭘 먹고 살아요.” 우리 어른들의 때 묻은 생각에 비해 아이들은 참 맑고 깨끗한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도 이런 어린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보셨고 한 어린 아이를 사람들 앞에 세우셨고 이내 그 어린 아이를 품에 안으시고 37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예뻐해 주는 어린이집 교사들은 모두 구원 받는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아이도 어른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영접해야만 구원이 임함을 믿습니다.
본문을 바로 이해한다면 분명 그것은 아니지요 여기 37절에서 “누구든지 예수 이름으로” 라는 말씀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 이름을 사용하는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하는 구원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 받은 자라면 당연히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1996년도 “그 말씀”이란 책 2월호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신학교수 헬리누엔박사가 잘 나가던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박약아시설인 데이브 레이크 복지원에 들어가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용변을 치우기도 하고 목욕도 시켜주고 식사하는 것도 돕고 행동교정도 해주면서도 헬리누엔박사는 마음 내면에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하버드대학에서 장래가 보장이 되고 물질에 넉넉함을 누릴 수 있는 교수직을 버리고 궁핍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택한 것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것에 대한 답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의 책이 출간이 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예수의 이름으로”였습니다. 헬리눈엔박사는 거기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동안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해 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버드대학에 교수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내가 저술한 20여권의 책은 많은 학생들과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신박약인 한 소년 아담을 만나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지려할 때 나는 그제서야 이 낮아지려는 나의 내리막에서 예수님이 진정 내 마음에 부딪혀 옴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오르막길에선 만날 수 없었던 예수님을 인생의 내리막길에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로 교훈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인간의 욕심에 끌려 살 땐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오직 자신의 허황된 꿈만 보일뿐이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주님 예수와 그분이 사셨던 방법을 바라보고 따라한다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겸손이란 하나님이 우릴 깎아 내리시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사신 삶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를 세우신 것은 구원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올바른 삶을 말씀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신 배후에 사건이 무엇입니까?
33~34절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에게 있었던 일은 12명 중에 누가 크냐는 문제였습니다. 만 이천 명도 천이백 명도 아니고 고작 12명 중에서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이렇게 크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35절에서 결국은 많은 이들의 끝에 있게 되고 수종을 드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품에 안을 정도의 나이엔 이런 일에 대해 신경도 쓰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품에 안은 아이는 누가 크냐는 것에 대해선 관심도 없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언제부터 누가 크냐는데 관심을 갖기를 시작합니까? 부모가 끌어안고 설 수 없을 때가 되면 누가 큰가에 대해 관심이 생깁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우리 첫째 외손주 진현이가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와서 자기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엄마 나 태권도를 배워야 될 것 같애” 혹시 아이가 학교에서 맞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 때문에 엄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래서 “널 누가 때리니?” 하고 물으니까 진현이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아닌데 자기 반에 좀 큰아이가 같은 반 친구를 괴롭힌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태권도를 배워서 막아주고 싶다는 겁니다.
무엇입니까? 벌써 초등학교 일 학년만 되어도 누가 크냐하는 서열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상태입니다. 그러나 품에 안은 아이는 서열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나 엄마가 옆에 있기만 하면 만족합니다. 예수님은 어른들에게 이런 어린아이가 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말씀을 하십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런 어린 아이를 마음에 영접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영접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고 곧 하나님을 영접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영접해 드리기를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무엇입니까? 내 이름으로는 누가 크냐 하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예수 이름으로 살면 누가 크냐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빌2:3~5절입니다. 함께 읽고 내 삶에 지킬 말씀으로 삼겠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남을 낫게 여기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하라고요? 품으로 영접해드려라 이 마음은 누구의 마음을 마음에 품는 것과 같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38절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이 무슨 말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전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크게 생각했고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면서도 요한처럼 예수님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작게 여겼음을 회개하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39~40절에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누구라는 겁니까?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고 우리를 위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크다는 문제보단 뭡니까? 화목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1~42절입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크고자 하는 것을 버려서 얻는 것이 무엇이랍니까?
땅에서 화목하게 하는 일을 통해서 하늘에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크고자 해서 얻어지는 결국이 무엇입니까?
많은 작은 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만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화목은 깨어지고 마니 이런 사람은 무거운 맷돌에 의해서 바다에 던져져 떠오르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누가 크냐를 따져서 작은 자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아니고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사람들이어서 모든 작은 자들의 화목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우리의 육신이 화목을 방해하는 일을 한다면 그 육신을 내 버리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아주 엄하게 화목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 전체가 그렇다면 연자 맷돌을 매어서라도 그런 육신의 세력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낫고 그것이 손이라면 발이라면 눈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화목을 깨는 사람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 지옥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지옥의 지옥불은 어떤 불입니까? 구더기도 죽지 않는 불 그러면서도 꺼지지 않는 불 그곳의 영혼들은 불속에 던져지는 소금처럼 탁탁 튀기듯이 괴로움을 겪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지옥에서 불속에 던져진 소금이 되지 말고 이 땅에서 살면서 소금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저 사람은 일 미터 팔십이구나 참 크기도 하지 저 사람은 일 미터 육십이로구나 참 작기도 하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늘에서 보실 때 땅에 서 있는 인간 모두의 검은 머리만 보이신데요. 내가 크다하는 그 순간에 화목은 깨어집니다. 스웨덴을 여행하는 미국사람이 버스에 타서는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내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주 잘 되어서 국민 누구든지 원하면 백악관에 들어가서 미 대통령과 만날 수 있습니다 하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옆 자리의 스웬덴 사람도 자기 나라 자랑을 합니다. 우리 스웨덴은 얼마나 평등사회인지 국왕도 버스를 타고 다닌답니다. 그리고 다음 정거장에서 그 사람이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버스 승객 한 사람이 미국사람에게 “방금 전에 내리신 분이 스웨덴 국왕이신 주스타브 아돌프 6세입니다.” 라고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5:9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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