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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3:1~11절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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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2-02-11 00:00    조회 6,718    댓글 0  
 
사도행전 23:1~11절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2012. 2. 12
유대인들에게는 산헤드린공회라는 최고의결기관이 있었습니다. 모두 71명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데리고 가서 세운 곳이 바로 유대인 최고의결기관인 이 공회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자신은 지금까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하니까 아나니아라는 대제사장이 바울 곁에 있는 사람에게 그 입술 좀 치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그 말이 참으로 듣기가 거북하고 가소롭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바울이 너는 겉은 회칠해서 깨끗해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아니한 더러운 회칠한 담이야 그런 너를 하나님이 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붙들리고 기도 깊이 하는 바울은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을 보니 남을 재판하는 자리에 앉아있지만 그렇지 못한 오히려 썩어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곁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사장을 네가 욕을 하느냐 하니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미처 몰랐다 말씀에도 있는 것처럼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다 알았으면 비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산헤드린공회의 구성멤버가 크게 둘로 나눈다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모든 말씀을 정경으로 받아 믿는 사람들인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믿는 사람들로 죽은 자의 부활이나 영이나 천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믿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심문을 받는 이유는 한 가지인데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심문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다투는 큰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천부장은 이 다툼의 논쟁으로 인하여 바울이 상할까봐서 바울을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서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입니다. 바울 곁에 예수님이 서서 말씀하시기를 “바울아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날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 가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공회원들에게 말한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그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소설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은 소설 속의 인물 영호를 통해서 양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손끝에 가시 같은 것이에요 조금만 잘못을 해도 계속 찌르거든요 그런데 양심의 가시를 빼면 그때부턴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 영호는 양심의 가시를 뺏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권총강도를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양심은 자기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또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하였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제자가 신기료장수에게 신발을 외상으로 사면서 며칠 후에 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돈을 갚기로 한 날 신기료장수를 찾아갔더니 글쎄 신기료장수가 죽었다지 뭡니까? 피타고라스제자는 주려던 돈을 도로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면서 신발 한 켤레를 공짜로 얻었다는 은밀한 기쁨에 젖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핼쑥해져 갔습니다. 마침내 피타고라스제자는 신기료장수의 가게에 신발값을 던지면서 “자 받아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은 죽은 사람이지만 내게는 살아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백성들이 정치하는 사람들에게서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바로 깨끗한 양심 이것을 원하는 거지요. 그러나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양심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의 양심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인간의 양심은 인간의 영과 같은 것으로 본래 하나님을 지각하는 기관인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양심은 변질되어서 하나님을 지각하기보다는 겨우 선악을 구별하는 정도로 전락이 돼버린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에 사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에 대해 깨닫는 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선악을 옳게 구별을 못해서 양심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롬3: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양심을 회복할 길이 없을까요? 히9:14절입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과거에 행한 모든 잘못을 회개할 때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흘리신 예수의 보혈이 그 잘못된 양심의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세기 때 청교도인들은 양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었는데 청교도인들이 생각하는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기관으로 보았기 때문에 항상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데 힘썼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오늘까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은 거짓 없이 진실 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난 회심의 사건도 하나의 거짓도 들어가 있지 않은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가 예수 믿는 사람들인 우리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양심이 회복된 사람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죽은 행실을 지시하던 양심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예루살렘 공회에 서기 전인 20년 전에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잡아 가두라는 공문을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았었습니다. 20년 전 그 대제사장이라면 바울도 알아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 것을 보면 20년의 세월 동안에 대제사장이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바울이 공회 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자신의 회심과 개종에 대해 진실  되다는 이야기를 할 때 대제사장이 있다가 바울 곁에 선 사람에게 바울의 입 좀 치라고 말합니다. 왜 입니까? 20년 전에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있어서나 유대교에 있어서 유대교 지도자들인 자신들이 할 일을 바울이 나서서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잡아오고 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일군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변절자가 되어서 오히려 자신들에게 예수복음을 전하기 위해 서 있는 것이니 얼마나 바울이 미웠겠습니까? 그래서 대제사장은 그 미운 감정을 조절치 못하고 폭력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그런 것은 이해가 되지만 여기에 맞서 바울도 발끈합니다. 그렇게 지시한 대제사장을 향해 너는 뭐냐 겉과 속이 완전히 달라서 진실하지 못한 이 외식자야라고 직선적으로 아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책망합니다. 대제사장을 상대로 네가 이런 욕을 보일 수 있느냐 바울은 이에 대해 몰랐다 성경에도 있잖느냐 관원들을 비방하지 말라는 말 내가 알고 있다 몰라서 그랬다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분노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나쁜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대제사장의 말에 발끈하지 않습니까? 분노를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으면 병이 된데요 그렇다고 분노를 조절 없이 드러낸다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보다도 내가 큰 손해를 입게 됩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 생각하고 다른 것에 대해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용납지 않는 이기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친구가 방문했을 때 마침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큰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분노를 외면한 채로 친구와 계속 대화를 하고 있으니까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물이 담긴 큰 물통을 들고 와서는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부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친구에게 하는 말이 “천둥이 친 후에는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지” 하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더랍니다. 상대방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상대는 검지 손가락 하나만 향하고 있지만 나를 향해서는 장지 약지 애지 세 손가락이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작가 조신영씨의 쿠션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라클레스가 가파른 절벽의 샛길을 걸어가다가 사과만한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는 발로 차버립니다. 그랬더니 수박처럼 더 커지는 것이 아닙니까? 한 번 더 차니까 이번엔 큰 바위만큼 되더랍니다. 이것 봐라 내 힘을 시험해 보겠단 말이지 열이 오른 헤라크레스가 햄머로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두 배나 커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그것과 씨름하다보니까 나중에는 산처럼 커져서는 샛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니까 다시 예전의 사과 크기 모양으로 줄어들어 길가에 툭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과만한 이상한 물체가 바로 분노라는 것으로 이것은 건들면 건들수록 커지는 경향이 있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분노는 반드시 다스려야 되는 것인데 구스여인을 후처로 드린 모세를 그의 누나와 형이 비방합니다. 그럴 때 모세는 아무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엎드립니다. 민16:4절에 뭐라고 합니까?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기도로 분노를 풀어버리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인데 이런 사건이 있은 그날 밤입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바울아 담대하라 예루살렘에서처럼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해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그날 증언하였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비방하고 다투고 그 사이에서 바울이 새우등 터질  번한 위험한 순간을 만난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을 증언했다는 거지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울은 공회에서 의원들에게 죽은 자의 소망인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내가 심문을 받는다 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무덤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예수를 다마스커스에서 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예수 핍박자에서 예수 증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처럼 사두개인들모두가 믿지 않는 부활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만났고 부활을 믿는 여기 바리새인들과 함께 서 있다고 외친 것입니다. 지금 똑같이 부활을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바울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교리는 믿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모든 교리는 믿고 있으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내 곁에 서서 말씀하시는 주님으로는 받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10장9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4:19절입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누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까?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이
누가 예수님을 봅니까?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거처럼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이 누굽니까?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바울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바리새인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살아계신 예수님이 옆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으니 교리만 아는 자들이 아니라 실제로 매사에 부활신앙으로 사심을 통해서 생명 있는 역사로 바꾸시는 주님을 경험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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