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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11~15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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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1-07-30 00:00    조회 5,958    댓글 0  
 
사도행전16:11~15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        2011. 7. 31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드로아에서 주님 예수와 기도로 교제하게 하셨고 바울은 거기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로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한 사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는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떠나게 되었는데 중간 도착지인 사모드라게에 도착을 했고 그 다음날 빌립보의 네압볼리 항구에 도착을 하고 마침내 빌립보로 들어가게 되는데 빌립보는 마게도냐지방의 첫 성이었고 그때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었다는 겁니다. 이 성에서 며칠을 지나면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어디 있을까 해서 머물던 집 문을 나섰는데 그 앞이 바로 강가였고 마침 강가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여인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 여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어 주께서 그 여인으로 마음을 열게 하시니 예수 복음을 들어 은혜 받고 구원 받은 루디아는 빌립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바울의 일행을 모셔서 자신도 세례 받고 자신의 집에 거하는 모든 식구도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루디아는 뭐하는 여인이었느냐 하면 빌립보에서 자색옷감을 만들어 소아시아에 속한 두아디라시에 살면서 자신이 만든 자색 옷감을 파는 여인인데 이 여인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다는 겁니다. 세례 받은 루디아는 바울 일행에게 자신을 예수 믿는 자로 안다면 우리 집에서 머물라고 하도 강권하므로 바울 일행이 루디아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의 일행이 배로 작은 섬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직행이라는 말은 뱃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인데 그 뜻은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성령이 하시는 일을 자연의 바람까지 돕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시아에서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바울의 일행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헤매었습니다. 성령이 막으셨고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상황이 안 좋았다는 겁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은 마게도냐의 영혼들을 먼저 구원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벌이는 바울일행은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마게도냐로 가기 위해 배를 탔을 때는 전혀 다른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마게도냐로 속히 갈 수 있도록 앞이 열리고 길이 열리고 바람까지 돕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강가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여인들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뭐 때문에 강가에 앉아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이는 이들이 자색옷감을 만들어 파는 여인들이라는 사실이 이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는 데 당시 염색술이라는 것이 요즘처럼 화학적인 축출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순전히 천연 염색으로만 이루어지는 시대였는데 마더라는 나무뿌리에서 자주색감을 얻고 옷감의 색감이 오래가도록 하기 위한 원료를 강에서 사는 달팽이과에 속한 소라 고동의 내용물 중에서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주색 옷감 하나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소라 고동이 팔천 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주색 옷감 하나가 얼마나 비싼 옷감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가끔 성탄절이 되면 로마시대의 남자들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을 TV를 통해 보게 되는데 그때 왕이나 귀족들이 자주색 옷을 두른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그들이 입고 있었던 옷감들이 얼마나 귀하고 비싼 옷감이었는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들이 강가에서 뭐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소라 고동을 채취해서 강가에 앉아 분리작업을 하고 있었던지 아니면 소라 고동을 깨서 그 내용물 중에 자주색 천연염료가 오래가도록 하는 원료를 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바울의 일행이 바로 이들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부쳐 잡고 전도한다면 힘들 텐데 가만히들 앉아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던 겁니다. 더군다나 그 여인들 중 사장인 루디아라는 여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으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뜻대로 자신의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모든 죄에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예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주 그만이었던 겁니다. 이처럼 복음을 들은 루디아는 자기와 자기 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까지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놀라운 복음적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루디아가 예수 믿을 수 있게 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루디아 본인의 의지이기 보다는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분이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그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두아디라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소개가 되고 있는 겁니다. 바울도 예수 믿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여기 루디아도 그런 차원의 여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루디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전한 겁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의 주 예수,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죄로부터 이제 의로워졌다는 표로 부활하신 예수 만왕의 왕이신 예수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바로 그분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죄에서 구원을 주시는 그 예수가 믿어지도록 마게도냐로 인도하신 성령님 바람까지도 순풍으로 역사하셨던 성령님은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어 구원 받는 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마음을 열어주셔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분명히 똑같이 복음을 들은 다른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주로 믿지 못했습니다. 오직 루디아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주셔야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즉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루디아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어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된 것 역시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지 기도할 처소를 얻기 위해서 나갔다가 여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예수 복음을 전하였고 그때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 루디아라는 한 여인만이 성령이 그 마음을 열어서 믿게 하셨지 절대로 바울이 능력이 있어서 루디아가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디아처럼 내 의지도 내려놓고 바울처럼 내 능력도 내려놓고 오직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니라는 것 항상 하나님의 은혜였었다는 것 고전15:10절입니다. 내가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은혜요 내가 다른 이들보다 많은 일들을 한 것도 내가 아니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많이 수고하더라도 많은 숨은 봉사가 있더라도 내가 자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실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인 노인이 고기잡이 85일 만에 아주 큰 물고기를 잡아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 상어떼가 다 뜯어 먹고 항구에 도착했을 때엔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는 물고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작가인 헤밍웨이는 대단하게 생각하는 인생의 결국은 이렇게 허무한 것임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대단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계속 되풀이되는 생활로 인해서 무료해하고 공허해 한다는 겁니다.
이에 반해 바울의 삶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전도전략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전도에 대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자의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끄시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드로아에서 사모드라게섬으로 직행했고 빌립보 항구인 네압볼리로 거기서 빌립보로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안식일에 기도해야겠다는 감동을 받고 기도처소를 찾아 숙소의 문 앞에 위치한 강가로 나왔다가 거기서 루디아가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여시니 예수 믿게 되었고 그래서 빌립보지역의 복음전파의 전초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성령이 여시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매시간을 그리고 내 재능이 앞서고 내 능력이 앞서고 내 경험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날들을 성령님이 일깨워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세상과의 경계선은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령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세상 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령적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실제의 삶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사회인으로 사회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사회에는 나름대로 사람들이 추구하고 좋아하는 문화가 있고 풍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풍습이 있고 법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인조합이 있었고 그 조합에선 돼지머리를 놓고 제사 하는 것처럼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종교적 행사가 뒤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에 사용된 고기를 서로 나누며 술잔을 돌리며 방탕한 놀이로 흥을 돋구며 친교를 도모했다는 겁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예수 믿는 자로 구별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손해가 되더라도 믿는 자로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때론 질끈 눈을 감고 세상과 타협해야 하느냐 그런데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장사를 해 왔다는 것이고 이제는 예수 믿는 자로 더더욱 성별되게 살아야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루디아가 얼마나 열심히 있었느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그녀는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 받은 후에 바울의 일행을 진심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자기의 집을 전도자들의 숙소로 기꺼이 아니 강권하여 내놓는 섬김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했다는 겁니다. 이런 그녀가 자신의 본 집이 있고 장사 터가 있는 두아디라에서 교회를 세웠을 것이고 그 교회는 루디아의 섬김이 풍성했을 것이고 루디아 같은 많은 일군들로 인하여 두아디라교회는 나중에 이런 평가를 주님께로 듣게 됩니다. 계2:19절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사업도 사랑도 믿음도 인내도 섬김도 처음보다 나중이 더 많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비행기가 이륙도 중요하지만 착륙도 중요한 것처럼 우리도 사회 속에 살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분명한 경계선으로 성별을 지켜 갈수록 믿음과 사업과 믿음과 인내와 섬김이 더 많아지고 좋아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아라비아의 말이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훌륭한 말을 찾아다니던 사람이 백 마리의 말을 사들이게 되었는데 우리 안에 들여놓고 말들의 먹이는 충분하게 주었지만 물은 주지 않았답니다. 그 우리 안의 말들은 멀리 우리 밖의 냇가 흐르는 물을 보면서 물을 마시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하였습니다. 이때 주인은 우리의 문을 열어 주었고 말들은 물이 흐르는 냇가로 달려가기를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말들이 냇가에 가까이 다다를 즈음에 풀피리를 불러 말들을 불러서 세우고자 했을 때 백 마리의 말들 중에 오직 네 마리의 말들만이 그렇게도 목이 마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멈춰 서더라는 것입니다. 그 네 마리의 말들이 명마인 아라비아 말의 조상이라는 겁니다. 절제하는 말이 명마로 인정을 받는 것처럼 육신적인 욕구를 위해 달려가다가도 주님의 말씀에 의해 즉시로 멈춰 설 수 있는 주님이 인정하는 성별한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처음보다 나중을 더 아름답게 하시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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