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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1~5절 “이해와 융통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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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1-07-16 00:00    조회 5,686    댓글 0  
 
사도행전16:1~5절            “디모데에게 할례를”        2011. 7. 17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2차 전도여행에 데리고 가야한다. 바울은 아니다 절대로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면서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 교회의 이 두 지도자들이 얼굴을 붉히며 심히 다투었습니다. 마가요한은 1차 전도여행 때 수행원의 사명으로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팀에 합류를 했습니다. 마가가 수행원이 되었다는 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안전을 위해서 돕고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런 수행원이 밤빌리아의 버가라는 지역에서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가 떠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위험에 처해져 그 지역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마가가 수행원으로서 꼭 있어야 했었다는 겁니다. 쫓긴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를 떠나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치려는 위급한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 마가요한이 있어서 안전을 책임져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필요할 때 없었던 겁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마가요한이 꼭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왜 안 들었겠습니까?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선교지 루스드라에서 일어났습니다. 여기서는 이곳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졸도할 때까지 돌로 쳤다는 것입니다. 다행이 바울이 깨어났습니다마는 사람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시외로 바울의 시신을 내다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럴 때 누가 있어야 했습니까? 수행원인 마가요한이 꼭 있어야 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안전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안전의 사각지대를 만나면서 바울과 바나바는 집으로 돌아가 버린 마가요한 생각을 많이 했을 겁니다. 쟁기를 잡고 뒤 돌아보면 안 되는데 참 무심하고 무책임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1차 전도여행을 무사히 마쳤는데 5년이 지난 후 이제 2차 전도여행을 다시금 준비하면서 동역자 바나바가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자니까 바울도 사람인데 바나바의 제안을 좋아 할 리가 없었던 겁니다. 데리고 가자 안 된다 데리고 가자 안 된다 하면서 시작한 다툼이 나중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까지 갔던 거지요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저들이 천사가 아니고 심하게 다투는 연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로구나 그런데도 성령의 능력 받아 하나님의 큰일들을 이루어내었구나 그래서 참지 못하고 걸핏하면 화내기를 잘 하는 우리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믿는 우리가 화내는 모습은 아주 보기가 안 좋을 뿐 아니라 전도도 안 되고 기도도 안 되고 가정의 화목도 깨지고 이웃과의 사이도 멀어지고 인격도 절하되고 죄가 되는 것이니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성령님은 우리로 오래참게 하니까 숫자 몇까지 세라고요? 하나, 둘, 셋......... 열
저는 바나바도 이해가 되고 바울도 이해가 됩니다. 예수 안에서는 이해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바나바에게서는 그의 친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픈 과거를 잊어주고 다시 손을 붙잡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오는 친절 우리에게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바울에게서는 그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진리에 비춰서 이건 아니다 할 때 굽히지 않는 신실성 역시 이것 또한 우리에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나바도 이해가 되고 바울도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두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헤어져서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전도여행을 떠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면서 교회들을 견고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또 다시 간 곳이 어딥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니까 더베와 루스드라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5년 전 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곳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치는데 졸도할 때까지 그래서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들어다 버렸는데 그렇게 무자비하게 맞고도 놀랍게도 살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머리는 깨지고 얼굴은 찢기고 멍들고 온 몸은 돌에 맞아 피로 범벅이 되었던 다시 생각하기조차 끔찍했던 그런 상처가 있었던 그곳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또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에는 복음에 실패한 아픈 상처만 있을 것 같았는데 그곳 루스드라에 또 이고니온에서까지 칭찬을 듣는 제자 디모데라는 제자가 성장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 예수를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받아 증인을 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의 얼굴에서 마치 천사와 같이 빛이 나는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이 모습은 바울의 마음과 삶 속에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스데반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스데반처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디모데라는 큰 인물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불행이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직 화가 복이 되는 일만 있을 뿐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갈6:9절 말씀에 힘이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어느 여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렵사리 절약하고 그렇게 살아서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실직급여 팔십 만원으로 아파트관리비 내고 세금내고 그리고 남은 것으로 식량을 사고 1년을 넘게 그렇게 살았답니다. 분명 불행인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하더랍니다. 삼일 저녁 교회 가는 길에 집집마다 불이 켜져 있는 창문을 보면서 저들이 다 직장이 있을까 우리 가정처럼 실직한 가정도 있을까 뭘 하며 살까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 같은 가정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교회를 갔답니다. 이 무렵 이 여집사님이 자기 집 형편을 볼 때 도무지 살 길이 보이지 않더랍니다. 수많은 산을 넘어 여기까지 왔는데 남편이 실직하고 일 년이 넘다보니까 옛날처럼 모두 잃은 모습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하지도 않고 캄캄하지도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이 보다 더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살길을 주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안이 맘에 임하길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도무지 평안할 수 없는 환경에서 주시는데 화가 복이 되게 하심을 믿을 수 있었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한 것보다 그저 하루하루 생존하여야 하는 현실 가운데서 감사하게도 딸아이가 너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남편이 다니던 직장으로부터 복귀하라는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하여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오 또 화가 복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 믿으시지요 믿고 지금의 현실에서 실망하지 말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살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그래서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형편을 만날 때에도 갈6:9절의 말씀을 암송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할렐루야! 스데반의 순교가 바울을 만들고 바울의 돌 맞음이 디모데를 만들 거라고 그 당시 누가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믿고 섬기는 우리에게 우리 가정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찬송 384장의 가사처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는 것과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시지요? 그렇다면 롬8:28절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알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아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일을 하나님이 이루신답니까? 나쁜 일도 아픈 일도 슬픈 일도 고통스런 일도 그리고 실패도 바꾸셔서 그걸 통해 더 좋게 선하게 하신다 아멘?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3절에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만난 디모데를 당장 전도 팀에 합류를 시킵니다. 그 정도로 디모데의 신앙은 성숙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에 디모데로 하여금 그곳 유대인으로 말미암아서 할례를 받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 안디옥교회에서 목회할 때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예루살렘에서 온 어떤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반박하기를 무슨 소리냐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 것이지 할례를 받아야 참 구원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모 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이 문제로 처음으로 교리로 인한 종교회의가 열리고 결정이 나기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바울의 모순입니까? 아니면 바울의 융통성입니까? 만약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할례라고 했다면 당연히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을 겁니다. 디모데는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헬라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모계사회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이방인일 때 그 자식을 유대인으로 여기지만 반대로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일 때는 그 자식을 유대인으로 여기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교육이 어머니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유대인입니다. 앞으로 전도여행에서 유대인인인 디모데가 같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할례문제로 시비가 없도록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한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할례가 아니라 유대인에게 같은 유대인의 자격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매끄럽게 하기 위한 바울의 융통성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바울의 융통성이 빛을 발합니다. 이래서 이들의 전도를 받은 여러 교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는 날마다 더 늘어가는 부흥이 있었습니다.
기생라합은 자기 집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람들을 옥상 삼대 밑에 숨겨줍니다. 그들을 찾으려고 온 정부의 군사들에게 그들이 떠났는데 멀리가지 못했을 것이니 쫓아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거짓을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융통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주머니를 불리려는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리려는 목적을 둔 거짓말이었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가고 하나님은 이런 기생라합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축복하셨습니다. 지금도 중국에 성경책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걸리면 모두 빼앗겼다가 다시 돌아갈 때 찾아가야 합니다. 공산권이 존재할 때 절대로 성경책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숨겨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걸리면 감옥에 가서 고통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성경을 숨겨서 들어가는 선교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아야 할 수많은 영혼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전해주므로 저들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융통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주머니를 배불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의 영혼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그들에게 같은 유대인으로서 디모데를 간격 없이 저들에게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은 영혼을 사랑하고 살리려는 융통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타협하는 융통성 즉 자기 주머니를 위한 융통성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 죄 값을 치루게 하시지마는 사람을 살리는 일들을 위한 융통성에 대해서는 복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이런 융통성을 가지고 세상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그래서 복이 되고 은혜가 되고 이런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부흥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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