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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27~31절 “나를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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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3-11-30 00:00    조회 6,029    댓글 0  
 
마가복음14:27~31절      “나를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2013. 12. 2
여기서 궁금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실이 어떻게 복음서에 기록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알아서 고백하지 않고서야 그 누가 개인적으로 일어났던 이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후회되고 수치스러운 일을 왜 감추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도록 드러냈을까요? 71절에선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철저하게 감추고 싶은 일일 텐데 베드로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자백했다는 것이 참 놀랍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두 얼굴을 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부인했던 사실을 자백했던 베드로인데 이 두 얼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거기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너무 믿은 나머지 큰 후회가 되는 일을 하고 말았던 겁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너무 믿지 마세요. 후회하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중국의 주희라는 자가 살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열 가지 후회를 기록한 것을 주자십회라고 부르는데 그 첫째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후회한다. ②가족에게 친절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후회한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③젊을 때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 ④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후회 한다. ⑤부유할 때 아껴 쓰지 않으면 가난하게 된 후 후회 한다. ⑥봄에 밭 갈고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이 된 후에 후회한다. ⑦담장을 미리 고치지 않으면 도둑맞은 후에 후회 한다. ⑧이성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후에 후회한다. ⑨술 취해서 망언한 것은 술 깨고 난 후에 후회한다. ⑩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손님이 떠난 후에 후회한다. 무엇입니까? 다 빤히 아는 일인데도 잘 지켜지지 않아서 후회하는 문제들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후회 없는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베드로도 후회했고 가룟유다도 후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후회는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는 계기가 된 반면에 가룟유다의 후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후회로 남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사람 믿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사업을 하시면서 복음을 위해 뛰시던 우리 신경호 안수집사님이 가나에서 가장 믿는 현지사람에게 모두 재산을 잃어버리고 오셨었습니다만 하나님은 믿지 못할 인간의 상처를 영원히 믿을 만한 하나님이 모두 정상 이상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양육할 때 드라마처럼 연기를 통해서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한 열 살 정도 되면 함께 놀아주던 아버지가 아이를 냉혹하리만큼 밀쳐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의 이런 돌출행동으로 인해서 놀라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는 거지요. 아이는 그래도 아버지에게로 다시 파고들려고 하는데 두 번째도 역시 매몰차게 밀어낸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당황한 나머지 엄마에게로 달려가게 되는데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는 그제 서야 이것이 너를 교훈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꾸면 낸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이에게 절대로 사람을 믿어선 안 되고 그 상대가 아버지가 되더라도 믿지 말고 오직 믿을 이는 한 분뿐이신데 하나님 외에는 없으신단다하고 교훈을 하면서 시146:3~5절의 성경구절을 암송시킨다는 것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베드로가 대제사장 집의 뜰에까지 들어가서 불을 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14장 54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6절부터 다시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실은 55-6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심문 받으시는 장면이나,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맞으시는 수모를 당하고 계셨던 모습을 베드로가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부인(否認)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예수님이 계시는 바로 가까이에서 베드로는 자기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이 던진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는 지적에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고 말함으로 예수님이 들으시는 중에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부인했다는 말씀입니다. 68절에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표현은 완벽한 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여종을 피해 앞뜰로 나갑니다. 앞뜰은 뜰의 현관을 말합니다. 앞뜰로 나가 들어오는 현관에 있었다는 말은, 뜰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베드로의 어정쩡한 마음의 상태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여종이 그에게 또다시 “그 도당이라”고 하여 예수님과의 관계를 재차 추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부인합니다. 세 번째, 사람들이 69절에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고 추궁 당하자 베드로의 입에서 저주가 나오며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하고 부인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바로 그 앞에서 한 말입니다.
얼마 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막8:29절에 “주는 그리시도시니이다”라고 자신이 고백했던 것을 일순간 뒤집어 버렸습니다. 베드로 뭡니까? 반석입니다. 그렇습니다. 반석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예고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이 베드로의 장담이나 제자들의 외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후회와 절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장 강하게 부인하며 모른다고 잡아 땠습니다. 강한 것 같으면서도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안자란 제나라의 재상은 키가 150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데 국민적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차를 끄는 마부는 키가 180센티나 되었습니다.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안자를 보기 위해서 모였는데 그 앞을 지나가는 마부는 어깨를 펴고 의기양양합니다. 반대로 안자는 남이 볼 새라 자신을 감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역했습니다. 마치 베드로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 싶습니다. 폭도들을 칼로서 제압하려는 베드로가 아니라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어야 맞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완강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중에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예수님도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지난밤에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언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울었습니다. 반석처럼 자신의 의지를 믿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이란 예고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절대 그런 일을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 강할 것 같은 반석 같은 의지는 산산이 부서져버렸습니다.
베드로는 마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는 마가에게 “내가 예수님 앞에서 그를 부인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무시해도 좋을 여종 앞에서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이다. 그런데도 놀라우신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 것을 결코 그만두시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나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셨다”고 말해주었을 겁니다. 또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나는 예수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나는 이와 같이 예수님을 실망시켜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용서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라고 설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마가나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인으로 들려주고 싶은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 장면이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가 못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했던 사람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실패했고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 이 본문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어느 눈 내리는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청년 챨스 스펄젼은 어느 작은 교회당에 도착했었고 마침 그 교회의 설교자는 사45:22을 설교의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비록 설교의 어투와 논리는 변변치 않았지만 설교자의 태도는 너무나 진지하였습니다. 그 설교자는 맨 뒤에 앉아 있던 스펄젼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젊은 친구! 자네는 몹시 비참하게 보이는군···만일 오늘 본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계속 비참할 것이야.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게나. 그러면 살 것이야.” 그때 청년 스펄젼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의 영혼에 덮여 있던 흑암은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구원을 찾았고 그가 바로 훗날 그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목사님입니다.
우리가 숨 쉬고 있다고 해서 생명이 있다고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생명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마치 꽃병에 꽂혀 있는 꽃과 같습니다. 오래지 않아 시들고 맙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생명입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사랑의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눈물 흘리는 베드로를 위로하시는 눈빛이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부인하고 때로는 도망치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실패와 절망에 한숨 짖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베드로에게처럼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철저하게 무너져 본 사람만이 완전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절망과 후회 그리고 인간적 한계를 느끼신다면 주님을 바라보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에겐 그런 연약함에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철저하게 무너진 베드로는 참으로 완벽하게 다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일으키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가장 절망적이고 비참할 때가 오히려 그분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임을 알고 주님께로 가까이 가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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