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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35~40절 “옥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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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미디어부    작성일 11-08-20 00:00    조회 5,899    댓글 0  
 
사도행전16:35~40절      “옥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하여”  2011. 8. 21
로마행정관의 수행원들을 릭토르라고 부르는데 바로 그 릭토르들이 휘두르는 막대기에 바울과 실라가 피투성이가 됩니다. 온 몸은 쑤시고 찢어지고 터진 상처는 아픔을 더하고 이것도 모자라서 바울과 실라는 사형수들이 들어가는 지하 감옥에 갇혀버립니다. 이때 간수는 얼마나 사람이 냉혈 인간인지 피투성이가 된 바울과 실라를 씻겨주지도 않은 채 그대로 가랑이를 최대한 벌리게 하여 두 발을 차꼬에 채워버립니다. 매 맞은 고통과 더불어 차꼬에 채워진 고통이 더하여 배나 더한 고통과 온 몸의 불편함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그 증거로 지진과 더불어 그 냉혈인간 간수가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들은 옥에 들어오기 전과 같이 여전히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상에 있을 때나 지하 감옥에 있을 때나 편안했을 때나 지금 고통하고 있는 때나 상황에 관계없이 문제에 관계없이 바울과 실라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동행을 몸으로 그리고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성공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하나님을 존경하며 그 존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바울과 실라는 성공과 행복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그들의 몸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여집사님께로부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서 진정한 예배 살아 있는 예배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존비비어의 동행이라는 책에 그 책의 저자 존비비어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가 브라질에서 전국적으로 교회들이 연합해서 열리는 연합집회에 강사로 초빙이 되었을 때인데 집회 장소에 가까이 갔을 때 주차장에 주차된 많은 차량들 그리고 건물에서 들리는 뜨거운 찬양 그리고 자신을 열렬이 환영하는 스텝들로 인하여 흥분과 기대감에 가슴이 달아올랐다는 겁니다. 강단으로 안내되기 위해서 강당으로 들어섰을 때 강당 안의 찬양은 매우 좋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실력은 아주 훌륭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존비비어는 이상스럽게도 이 훌륭한 집회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도무지 느껴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존비비어가 강당 안을 둘러보니 뜨겁게 함께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군데군데 여기저기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멍하니 따분하게 앉아 있는 사람 또는 들락거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 자세와 표정을 보니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 쇼가 빨리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더라는 거지요 막상 예배가 시작되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계속이 되었고 설교의 시간이 되었을 때 존비비어목사님이 강단에 섰습니다. 강단에 선 존비비어는 이런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청중은 비로소 조용해 졌습니다. 그제 서야 존비비어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무관심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면 어떨까요? 물론 기분이 나쁠 겁니다. 이웃집 초인종을 누를 때 집 주인이 당신을 건성으로 맞이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다시는 그 집에 찾아가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존비비어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왕의 왕 주의 주께서 합당한 영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곳에 오실까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설교를 주의 깊게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실까요?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입니다. 왜 일까요? 이유는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존경받지 못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대통령이 이 강단에 섰다면 경의를 표했을 겁니다. 기대를 가지고 대통령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건성으로 듣고 건성으로 읽지 않았나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존비비어는 시편5:7절의 말씀을 하면서 다윗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했는가를 말씀합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 하리이다.” 다윗의 예배는 어떤 예배였다고요? 주를 경외함을 가지고 예배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존비비어는 레위기19:30절 말씀을 덧붙입니다. “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하여 귀히 여길 줄 아는 예배자를 하나님이 찾으심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가 경험할 수 있느냐 존비비어는 레위기10장3절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나타나는 그분의 거룩하심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누가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을 진정으로 가까이 하는 경외함을 가지고 드려지는 예배자라는 거지요 하나님이 어디에 임재하신다고요? 뜨거운 찬양, 열띤 설교, 많은 무리들 그리고 성공과 행복에 무게를 둔 예배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을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가까이 하는 변함이 없는 동행의 자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셨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습니까? 지진으로 나타났고 그 지진은 오랫동안 지하 어둠에 함께 사형수들과 살면서 그들만 보면서 그리고 사형집행을 하면서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지고 냉혈한 인간으로 바뀌어버린 바로 그 간수 그렇기 때문에 옥 속으로 던져진 피로 범벅이 된 바울과 실라를 씻길 생각은커녕 또 하나의 고문 기구인 차꼬를 아무런 감정도 없이 바울과 실라의 발목에 채워버리고 나가버린 그 간수가 놀랍게도 구원받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원 받으니까 그 간수가 어떻게 달라집니까? 구원 받기 전에는 바울의 온몸에 피 범벅을 씻겨주는 것에 냉담했던 그가 구원 받은 후로는 겸손히 말씀을 들었고 자신의 관사로 데려가서 다 씻겨주더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례를 받았고 이번에는 자신의 본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웃음을 오래 동안 잃었던 그가 기쁨을 되찾는 일이 일어 난 것입니다. 주를 경외함으로 드려지는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의 예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불가능한 일들에서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니 우리 또한 주를 경외함으로 드려지는 예배자들이 되셔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감옥의 권세들에게서 구원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 옥에서 일어난 지진의 소문은 아마 모르긴 해도 로마의 행정관의 귀에 들렸을 겁니다. 괜한 사람들을 건드린 것이로구나. 별 큰 죄목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패고 지하 사형수들이 갇히는 감옥에 차꼬까지 채워서 가둔 일이 영 찜찜했기 때문에 아침이 밝자 곧 로마의 행정관은 부하들을 보내서 이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말합니다. 궁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로마의 행정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행정관의 행위에 대해서 37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무슨 소리냐 우리는 로마시민인데 로마시민인 우리를 아무런 죄도 정하지 않고 데려다가 때리고 옥에 가두더니 이제는 가만히 그냥 나가라고 우리는 그렇게는 못한다. 로마의 행정관을 데리고 오라 그가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우리가 나갈 것이다.”라고 말한 겁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천국의 시민권이 참으로 소중한 것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로마의 시민권을 아무 때나 사용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할 때 사용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이 당시에 그렇게 위력이 있었다면 로마의 행정관에게 잡혀 갔을 때든지 행정관의 수행원들인 릭토르들에게 몽둥이 세례를 받기 전이라든지 옥에 들어가기 전이라든지 그때 사용했어야 되지 않았겠느냐는 거지요 왜 맞을 것 다 맞고 옥에 들어가 고통당할 것 다 당하고 로마의 행정관이 나가라고 할 때 말 할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세상이 준 권리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일차 전도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 날 때에도 세상이 준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위급함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시민권이라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아예 돌 맞아 졸도하기까지 했어도 그 위험을 넘기려고 로마의 시민권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야깁니다. 다 맞을 것 다 맞고 겪을 것 다 겪고 이제 풀려서 나가려고 할 때 로마의 시민권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잘못된 로마행정관의 일처리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억울하게 당하는 서민이 생기지 않도록 이유도 묻지 않고 이방인이니까 약하고 힘없고 무고한 시민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겠금 의롭게 올바르게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결국 로마의 행정관은 몸소 행차를 해서 바울과 실라에게 처음과는 다르게 아주 공손하게 빌립보 성을 떠나주시기를 청하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 로마의 행정관은 이번 사건으로 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 증거 없이 무고한 일 처리가 생기지 않겠끔 심사숙고해야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일행에 의해서 세워진 루디아의 사랑방은 간수의 가족들과 함께 성도들이 많아져 교회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때 로마의 행정관은 그 마음대로 제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로마의 시민권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고난에는 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고난의 자리로 자신들을 밀어 넣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옳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함부로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랬길 잘 했습니다. 깊은 옥에서 꼭꼭 숨겨져서 어두운 마음으로 아무 기쁨 없이 살다가 결국 냉혈한 인간으로서 생을 마치고 말 간수와 그 가족이 그리고 죄수들이 어찌 이 놀라운 구원 역사를 경험했을 수가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로키산맥 해발3000미터 지점부터 수목한계선이랍니다. 더 이상은 수목이 자랄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이 3000미터 한계선에 자라는 나무들은 얼마나 그 바람이 강한지 그 매서운 바람 때문에 높이 자라지를 못하고 나무들이 모두 무릎을 꿇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재질이 얼마나 좋은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린은 바로 이곳의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고난과 시련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음을 우리도 신뢰하는 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 신뢰하는 것을 방해하는 적은 바로 내게 있는데 그것은 모든 상황이 불리해 보이는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서 무엇을 봅니까? 고난이란 지나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믿음의 신뢰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참으로 놀라운 흔적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성공과 행복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꿈꾸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곧 예배임을 알아서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바라고 고난과 문제 앞에서 담대하기를 바라고 권리를 남용하기보단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살펴서 순종하여 잠간 지나가는 고난을 통해서 아름다운 구원의 자국을 남기는 하나님 신뢰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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