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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1~50절“예수님을 만나 사귐이 있는 관계를 가지면 진리에 눈 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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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2-07-15 11:15    조회 1,364    댓글 0  
 
눅2:41~50절“예수님을 만나 사귐이 있는 관계를 가지면 진리에 눈 뜨게 됩니다” 2022.7.17.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무더위의 특징은 사람을 지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이렇듯 더위 못지않게 코로나19로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지치고 힘든 때 누군가 곁에 있어 같이 걷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으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도 함께 하면 힘이 되는데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만물 위에 계시고 지극히 찬양 받기 합당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해 주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동행 해 주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힘과 의지가 되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유월절을 지키려 그의 부모가 예루살렘에 동행한 사건에서 예수님 탄생 외에 12살 때의 삶을 소개한 사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최초로 소개가 되고 있는 이 본문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41~42절을 볼까요.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예전엔 출23:17절에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이렇듯 유월절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에 성인이 된 남자들만 지키던 것이 나중엔 여자들도 참여하게 되었다는 거고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뿐만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도 신앙적 열심과 경건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마다 빠지지 않고 예루살렘을 찾았다는 거지요 그런데 다른 해와는 다르게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맞은 유월절엔 예수님이 그 부모와 동행을 했다는 거고 유월절절기의 관례를 따랐다는 겁니다. 그러면 관례를 따랐다는 것은 뭘 말하는 걸까요?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13세가 되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 의식을 마치면 ‘율법의 아들’이란 자격을 얻어서 회당에 출입이 가능했다는 건데 ‘율법의 아들’의 의식을 행하기 앞서 11살이나 12살이 되면 절기 때 예루살렘에 동행하여 율법의 아들이 되기 위한 소양들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12살이 될 때 예루살렘을 찾아 율법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소양교육을 배우려 올라갔다는 거고 이것이 뭐라고요? 11살 12살 소년들이 겪는 그 당시 ‘관례’였었다는 거지요 
43절을 보시지요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여기 ‘그 날들을 마치고’ 니산월 14일부터 21일까지 그러니까 유대력으로 새해 첫 달 1월14일부터 21일까지 어린양을 드리는 유월절 그리고 누룩이 없는 떡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이기도 한 한 주간의 기간이 모두 지나서 이제 집으로 모두 돌아가게 되는데 부모는 돌아가고 예수님은 머무셨다는 겁니다. 여기 ‘머무셨다’ 헬라어 ‘휘페메이넨’은 어쩔 수 없이 머문 것도 아니고 실수로 머문 것도 아닌 ‘자발적으로 머무셨다’는 의미거든요 자!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자발적으로 머무신 이 일이 요셉과 마리아 또 이 복음을 읽는 모든 성도들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의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는 거지요 다음 절 44절에서 뭘 말씀하고 있습니까?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여기 ‘동행중에’ 헬라어 ‘쉬노듀오’는 ‘함께 여행하는’ 그런 의미니까 ‘함께 여행하는 줄’로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 당시 유월절행사를 위해 오고 갈 때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한 동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였다는 거지요 그런가하면 아이들은 어머니를 따라 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아버지를 따라 갈 수도 있었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서로 예수님이 상대와 함께 가고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룻길을 갔다는 거잖아요. 주님과의 동행에 당연히 함께 하고 있겠지 하는 부주의를 오늘 발견하게 되네요.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겁니다. 자! 노중숙소에서 이제 가족끼리 만나는 시간인데 요셉과 마리아는 서로에게 있겠거니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거고 그래서 큰일 났다 싶어 친족과 아는 자 중에 찾았다는 거거든요 여기 ‘찾되’ 헬라어 ‘아나’ ‘반복’이라는 단어와 ‘제테오’ ‘찾다’는 단어가 합해서 만들어진 단어 ‘아네제툰’이니까 한번 찾고 만 것이 아니라 뭡니까? 반복해서 찾고 또 계속 찾았다는 거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45절에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근심과 조바심을 가지고 찾고 찾으면서 혹시 길에서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를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다는 거니까 하룻길을 왔고 다시 하룻길을 더듬어 올라갔고 이틀을 모두 길에서 다 보낸 거고 예수님을 보지 못한 시간이 적어도 사흘 가까이 흘렀다는 거잖아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요셉과 마리아는 당연히 주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할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사귐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주님과 누구보다도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과의 사귐의 관계가 요셉과 마리아처럼 단절이 된 채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주님과의 사귐이 없을 때 요셉과 마리아가 결과적으로 겪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근심과 불안, 초조함이었다는 거잖아요. 요1서1:3절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뭡니까? 주님과의 사귐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근심과 불안 대신 평안과 생명 그리고 기쁨과 능력이 됨을 믿습니다. 왜요? 이런 것들이 주님이 가지신 것들이니까요 요1서1:7절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고 그분의 깨끗함처럼 예수님과의 사귐에서 얻는 것은 성결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3일이라는 시간도 예수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두려운 일은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주님과의 사귐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가므로 내가 주는 평안이라잖아요 내가 주는 기쁨이라잖아요. 나의 생명을 주신다고 하시잖아요 그리고 기도라는 교통을 통해서 이런 일 능력을 겸험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성결의 사람들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힘이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6~47절을 볼까요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여기 나오네요 사흘이 지난 후랍니다. 어디서 예수님을 만났답니까? 성전이지요. 요셉과 마리아는 숙소에서도 길에서도 친척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그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거잖아요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과 안뜰 동남부에 각 하나씩 모두 세 곳의 회당이 있었는데 보통 랍비로 불리는 선생들이 율법을 강론하는 곳은 안뜰 동남부에 위치한 회당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명한 선생들과 말씀을 주고받는 어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다는 거거든요 여기 ‘놀랍게’ 헬라어 ‘엨시스탄토’는 ‘제정신을 잃어버리다’란 의미니까 계속해서 반복되는 놀라움으로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12세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여태껏 성경박사로 자타가 인정하는 선생들까지도 이 말씀에서 이런 의미가 있었어? 이 말씀에서 이런 오묘함이 있었구나! 아니 이런 어린아이에게서 어떻게 이런 지혜가 있을 수가 있지 그래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기절할 정도로 놀라워했다는 겁니다. 어째서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12세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분은 요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그분이 말씀 자체요 그분이 은혜의 산실이요 그분이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시니 그럴 수밖에 없으셨음은 너무도 당연한 거지요 골2:3절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러므로 랍비라고 불리우는 선생들이 어린 12세 소년 예수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소년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지혜가 머물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사55:8~9절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리고 이어진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선생들이 아무리 배웠다고는 하나 어찌 예수님의 지혜를 따라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성취하시는 예수님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높은 생각과 길이 펼쳐지며 하나님의 뜻과 형통함을 경험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8절을 보자구요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여기 그의 부모가 놀랐답니다. ‘놀랍게’ 헬라어 ‘엨시스탄토’는 ‘제정신을 잃어버리다’란 의미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 ‘놀라며’ 헬라어 ‘엑세플라게산’은 ‘압도되다’는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무엇에 압도되었습니까? 먼저는 유대의 석학들인 선생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주고받는 모습에 압도되었고 다른 하나는 심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전달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이야’랍니다 이 단어 ‘아이야’ 속에는 놀라움이 있고 안도감도 있으며 그리고 기쁨도 있고 더불어 책망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가 ‘아이야’ 헬라어 ‘테크논’이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고 말하지요 여기 ‘근심하여’ 헬라어 ‘오뒤노메노이’ ‘걱정으로 인한 심한 고통이 지속되다’는 의미거든요 예수님을 찾아 만나기까지 요셉과 마리아가 겪었던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이 되네요 예수님의 대답이지요 49~5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고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와 더불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아들로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마리아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 이 순간 마리아는 자기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대해야 했다는 거지요 그리고 또 하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룻길 숙소에서 찾고 길에서도 찾고 친척에게서 아는 이들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었다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은 어디 있음을 진리로 밝혀 주시나요. ‘내 아버지 집’이라는 거잖아요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진리로 밝히십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 집에 있어야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성전을 떠나는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요셉과 마리아처럼 성전을 향하여 우리의 걸음을 돌이키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전은 주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지는 곳이잖아요. 마리아는 ‘아이야’ 하면서 사귐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땅에서 찾고 있었지만 예수님과의 주고받는 사귐에서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까’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진리에 그분은 경배의 대상이라는 진리에 눈 떠지게 하시더라는 거 아닙니까? 오늘 우리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사귐으로 그분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라는 진리에 눈 떠지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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