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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2:25~30 “교회는 존귀히 하나님은 긍휼이 여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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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1-10-26 21:49    조회 2,375    댓글 0  
 
빌2:25~30  “교회는 존귀히 하나님은 긍휼이 여긴 사람”    2021.10.31.
바울사도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 AD61~63년까지 로마의 옥에 갇힌 채로 재판을 받고 있었거든요 이런 바울을 위해 빌립보교회에서 파송한 사람이 있었다는 거고 오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면서 그 속에 담긴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웝니다.

25절을 볼까요.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로마의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해 빌립보 교회가 보낸 자가 누구래요? ‘에바브로디도’라는 거지요 그런데 자신을 돕게 하려고 보낸 에바브로디도를 이젠 다시 빌립보교회로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 당시 헬라사회에서 아주 흔한 이름 중에 하나로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의미와 더불어 ‘매력적이다’라는 뜻의 이름이거든요 이런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이런 사람이야’라고 그가 얼마나 신앙인으로서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는 거지요 ①‘나의 형제’랍니다 뭡니까? 바울은 자신과 하나가 된 동료라는 걸 자랑스럽게 내세우잖아요. ②‘함께 수고한 자’라고 하지요 뭡니까? 바울과 함께 일을 해왔다는 겁니다. ③‘함께 군사 된 자’라는 건데 바울은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온갖 핍박과 세상의 권세 잡은 악한 영과의 영적인 싸움을 훌륭히 감당했다는 거거든요 ④‘너희 사자’랍니다 너희 빌립보교회가 날 위해서 파송한 대사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⑤‘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함으로 바울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감당했다는 거거든요 이렇듯 25절 한 구절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다섯 가지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본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에바브로디도는 햇빛의 비치는 각도에 따라서 색깔의 아름다움이 여러 색깔로 변하는 팔색조처럼 한 성령 안에서 여러 모양으로 바울에게 필요한 부분을 감당해 주는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성도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을 생각했다는 거지요 여기 ‘필요한 줄’ 헬라어 ‘아낭카이온’은 ‘불가피하다’는 의미니까 그를 보내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 훌륭한 일꾼을 붙들어 놓기 보다는 보내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걸까요? 26절에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뭡니까?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다는 것이 첫째 이유인데 여기 ‘사모하다’ 헬라어 ‘에피포돈’ 현재분사형으로 과거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그리워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불가피한 두 번째 이유가 에바브로디도 자신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빌리보교회 성도들이 알게 되었다는 거고 그 일로 인해 근심하게 된 때문이라는 거지요 여기 ‘심히 근심하게’ 헬라어 ‘아데모논’은 ‘고뇌와 슬픔으로 가득차다’라는 의미거든요 뭡니까? 에바브로디도는 병든 자신보다 병든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빌립보성도들을 더 근심하고 있는 그러니까 자신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는 거지요 참으로 본 받을 만한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였구나 하는 걸 깨달으면서 에바브로디도의 이런 삶이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7절을 볼까요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에바브로디도의 병환의 상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거지요 어떤 병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주석가 헨드릭슨은 ‘그의 생명은 한 동안 실 끝에 매달려 있는 목숨과 같았다’라고 주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토록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며 심지어는 죽었던 자 유두고까지도 살렸던 바울인데 곁에 있으면서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에바브로디도를 바라보는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까 자신의 질병이 떠나가기를 세 번 기도하고 응답 된 것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거였잖아요. 빌1:20~21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오로지 살아도 죽어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는 일이 목적이 바울의 신앙이었거든요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신유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이 또한 주님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할 뿐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뭡니까? 육신은 한계가 있다는 거지요 하나 되는 삶, 섬기는 삶, 열심히 일하는 삶, 군사처럼 영적싸움에 충실한 삶, 충실한 전달자의 삶, 바울 사도의 쓸 것에 대해 재정적으로 돕는 자의 삶을 살았으니 몸이 열이라도 모자라는 삶이 아닙니까?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안 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죽을병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고 말하잖아요 에바브로디도가 죽을병에서 건강을 찾게 된 것이 자신을 비롯한 여러 형제들의 애뜻한 간호와 돌봄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음을 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사도의 표가 뭡니까? 기적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임을 깨닫게 하는 바울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일에 헌신적인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셨다’ 헬라어 ‘엘레에선’은 ‘불쌍히 여기셨다’인데 바울은 이 긍휼이 여기심을 자신에게도 베푸셨다는 거지요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로 인해서 근심위에 근심하던 것을 없이해 주셨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육체의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병에서도 벗어나게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8~30절을 볼까요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긍휼은 에바브로디도의 죽을 병도 일으키셨잖아요. 우리의 헌신과 충성은 하나님의 긍휼 안에 거하게 하심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회복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로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왜일까요? 그만한 충성과 헌신의 사람 만나기가 어려울 거고 자신보다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 흔치 않는데 보낸 이유가 뭐랍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건강이 회복한 에바브로디도를 보고 기쁨의 재회를 갖게 함이요 또 하나는 죽을병이 걸린 에바브로디도를 위해 기도하고 간호하면서 겪었던 빌립보교회성도들을 무슨 낯으로 볼까나 하면서 가졌던 큰마음의 짐이지요. 에바브로디도를 보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 동안 가졌던 근심을 덜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에바브라디도를 보낼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고 하지요 여기 ‘모든 기쁨’헬라어 ‘파세스카라스’는 ‘진심을 다하여’거든요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쁨으로’ ‘파세스 카라스’를 말한 것은 바울이 에바브로디도가 자신 곁에서 그 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죽기를 다해 섬겼던 것을 기억하고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컸기 때문에 빌립보교회가 당연히 기쁨으로 영접할 것을 알지만 모든 기쁨으로 파세스 카라스로 영접할 것을 부탁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하잖아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이들을 말하는데 교회가 ‘존귀히 여기라’랍니다. 여기 ‘존귀히’ 헬라어 ‘엔티무스’는 ‘존경과 귀중히’ 여기라는 거거든요 이것이 빌립보교회의 풍토가 되어야 하듯이 모든 교회의 아름다운 풍토로 자리잡는 은혜가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재력이 있기에 많은 지식이 있어서 존귀함을 받는 세상과는 다르게 교회 안에서는 크게 재력도 없고 그렇다고 많은 배움도 없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에 여러 모양으로 섬기는 사람이 그리고 자신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고 하나님이 긍휼이 여길 만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충성하는 사람이 존귀로움의 대상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를 한 마디로 평가하는 말이 뭡니까? 30절이지요 “30절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반면에 교회의 대다수가 어떨까요? 21절에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그러니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존귀히’ ‘엔티무스’의 대상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다’에서 ‘돌아보지 않았다’ 헬라어 ‘파라볼류사메노스’의 의미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 걸었다’는 거니까 오늘날 코로나19가 처음 시작했을 때 대구로 달려갔던 의료진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라 할 겁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가 거리상 떨어져 있어 바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그 부족을 채웠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채우다’ 헬라어 ‘아나플레로세’는 ‘넘칠 정도로 채우고 또 채우는’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에바브로디도의 역할이 어는 정도였었는지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는 거지요 우리 모두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교회가 존귀히 여기며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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