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    |    |  
회원 로그인
회원 가입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가입으로 서비스 약관개인정보 보호 정책 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SUNYOU CENTERAL CHURCH
주일오전 설교원고

bo_title_img1.png

롬9:30~33절 “사람의 열심으로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의고 구원입니다”  
카카오톡 카카오 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밴드 주소복사
   김진수   작성일 21-06-04 21:43    조회 3,408    댓글 0  
 
롬9:30~33절  “사람의 열심으로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의고 구원입니다”  2021.6.6 
현대를 가리켜 도망가는 세대랍니다. 왜냐하면 책임지기 싫어하는 현대인의 모습 때문인 거지요 성숙함의 특징은 책임을 지는데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반대로 미성숙의 특징은 무책임이라는 거지요 무책임한 자는 무책임한 언행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다는 건데 예수님 좌편에 강도가 그랬습니다. 예수님 좌편에 달린 강도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라고 말할 때 우편에 달린 강도가 좌편에 달린 강도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책임을 말했다는 거지요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사망을 당하는 것이니까 누굴 원망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탓할 수 없는 무책임할 수 없는 거라는 거지요 우리의 죄로 인해 당하는 사망 우리가 책임져야하는 것이 맞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책임을 당신이 다 지시고 우리를 무죄한 자가 되게 하셨으니 참으로 놀라운 은혜인데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은혜를 좀 더 깊이 나누려 하는 겁니다.

30절을 볼까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서 선택된 이방인들인 우리가 어떤 이들이었습니까? 의를 따르지 않던 이들이었잖아요 여기 ‘의’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도덕적 의가 아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적관계로 생겨나는 ‘의’거든요 뭡니까? 나의 도덕적 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그런 의인 겁니다. 그래서 이 ‘의’를 ‘칭의’라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심으로 얻는 구원’이란 거지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방식으로 얻어지는 그런 의가 아니란 겁니다 사람의 의란 뭡니까? 여전히 죄를 바탕으로 세워지는 것이 사람의 의란 거잖아요 그래서 이 같은 인간의 의를 사64:6절에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뭡니까?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아서 깨끗할 수 없는 부정하다는 겁니다. 이런데도 이방인들인 우리는 인간의 의로서 구원 얻으려 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랬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언약적 관계에서 오는 ‘의’ ‘디카이오쉬네’를 얻었으니 이를 가리켜 뭐라고 한다고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 ‘무슨 말 하리요’라는 것은 ‘아무 할 말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아니라 뭘 말하게 된다는 겁니까? ‘우리는 도덕적인 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언약적 관계에서 의를 얻게 된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죄의 터 위에서 의로 살기위해 몸부림쳤었을 때 그 결국이 뭐냐 여전히 더러운 옷을 입음 같았으며 끝내는 그 죄악의 바람이 지옥으로 몰고 갈 것이었던 이방인인 우리를 하나님이 만세전에 선택하셨고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언약적 백성으로 삼아주시므로 얻는 의 곧 구원을 받은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1절을 보시지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자!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간 법이 뭐랍니까? 의의 법이랍니다 의의 법이란 뭘까요? 하나님의 법으로서 ‘율법’ ‘토라’를 말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의의 법인 율법을 따라갔지만 뭡니까?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는 겁니다. 뭡니까? 하나님이 의의 법인 율법을 주셔서 지킴으로 나의 백성으로 살라 하셨는데 제대로 다지키지 못하여 실패하였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 이방인들에겐 율법이 있음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뭡니까? 의의 법인 율법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디카이오쉬네’ ‘의’를 주셨다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 백성이라는 언약적 관계를 맺으시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옳게 되었다는 ‘의’ ‘디카이오쉬네’를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갔다는 ‘의의 법’에서 ‘의’는 ‘에이스노몬’이거든요 뭡니까? ‘도덕적 의’라는 거지요 그래서 의의 율법을 모두 다 지켰을 때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서 옳다고 여기시는 ‘의’ ‘디카이오쉬네’거든요 그래서 롬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하신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뭡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는 ‘의’ ‘디카이오쉬네’는 인간의 그 어떠한 노력으로도 불가능했다는 거고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율법의 의’ ‘에이스노몬’ ‘도덕적 의’를 지키려고 따라갔지만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었다는 거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어서 어떻다는 겁니까? ‘디카이오쉬네’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적 관계를 갖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론은 뭡니까? 이스라엘의 ‘도덕적 의’인 ‘에이스노몬’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 ‘의’ ‘디카이오쉬네’를 이룰 수가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의’는 인간의 수고 노력으로 안 되고 하나님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엡2:8절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2절을 보시지요.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여기 ‘어찌 그러하냐’ 헬라어 ‘디아 티’는 ‘무슨 이유냐’는 거지요 이스라엘백성들이 ‘디카이오쉬네’를 얻는데 실패한 이유가 뭐냐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거지요 저들의 열심은 예수님도 인정하시기를 마23:28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겉으로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고 뭡니까? 열심을 다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속은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는 거지요 이것이 뭡니까? ‘율법의 의’인 ‘에이스노몬’의 한계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백성들은 율법의 의인 ‘에이스노몬’ ‘도덕적 인간의 의’를 고집하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의, ‘디카이오쉬네’ 이 진리의 돌에 모두 부딪혀서 넘어졌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전1: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예수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부딪혀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면 이방인에겐 미련하게 들려서 부딪혀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더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왜 거리꼈습니까? 갈3: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 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달린 자를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거리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은 내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속량되었음을 믿기 때문에 유대인들하고는 다르게 거친 돌이 아니라 구원의 돌이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전1:24절에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제 33절을 볼까요.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이 어디에 기록되었나요? 사8:14절에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듭 말씀하시기를 사28:16절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두 집 북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즉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함정이 되고 올무가 될 것을 이미 예수님 오시기 육백 년 전에 말씀하셨는데 말씀 그대로 예수님 오셨을 때 시험한 돌 구원의 기초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해 이스라엘백성 대부분이 걸려 넘어졌다는 거지요 믿기만 하면 다급한 멸망에서 벗어날 건데 어떻게 넘어졌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저주 받은 자이니 믿을 수 없다 해서 넘어졌다는 거거든요 그러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히9:15절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인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그래서 의롭다하심 디카이오쉬네를 가진 자들이 된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일오전 설교동영상
공지사항
. .
.
교회앨범
비전센터 앞에 주차장이 이쁘게 완성되… 
동영상앨범
22년 낙도선교회
- -
-
선유중앙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회원가입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전체 최근게시글
  • 선유중앙교회 SNS를 방문해 보세요
    교회명 : 선유중앙교회 | 담임목사 : 김진수 | 주소 : 10811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독서울 5길 18-30
    교회전화 : 031-954-1080, 953-5977 | Fax : 031-954 1040 | 목사관 : 031-952-2097 | 이메일 주소 : yegrim@hanmail.net
    Copyright ©1955~2024   sunyou.or.kr. All Rights Reserved.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031-954-1080
    선유중앙교회 전화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