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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3~8 “지금까지 살아 온 일들에 대해 평가 받는 날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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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1-05-27 10:33    조회 3,459    댓글 0  
 
창4:3~8  “지금까지 살아 온 일들에 대해 평가 받는 날이 옵니다”    2021.5.30 
이제 여름철로 접어드는 6월을 이틀 앞두고 있는 주일이네요 여름이면 바다로 나가 수영을 즐기게 되는데 해수욕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부표로 경계를 정해놓고 이 선을 넘지 마라 합니다. 선을 넘을 때 사고가 나잖아요. 그렇다면 경계선은 뭡니까? 생명을 억압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선을 주셔서 그 안에서 살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자꾸 선을 넘어버리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3절을 볼까요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여기 ‘세월’은 히브리어 ‘욤’이라는 ‘하루’가 쌓여서 ‘날들’ 히브리어 ‘야밈’이 된 것을 말하는데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것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을 말하기 보다는 어떤 평가가 이루어질 시간이 되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뭡니까? 가인과 아벨이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들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므로 평가 받게 하셨다는 겁니다.
가인과 아벨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 온 일들이 끝이 나고 그 동안 얻은 것들에서 저들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려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학기말고사를 보는 것과 같은데 지금까지 한 학기 공부한 것에 대해 잠시 멈추고 시험을 치루는 것과 같다는 거지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히브리어 ‘욤’이라는 ‘하루’가 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끝이 있어서 반드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야밈’에 대해 하나님 앞에 내놓고 평가를 받게 되는 날이 온다는 거지요 그래서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지금까지 살아 온 삶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예외가 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고 이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시편기자도 시편90편8~9절에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평생이 다하는 날이 오는데 살면서 행한 모든 것 은밀한 것까지 하나님의 얼굴 앞에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욤’ ‘하루하루’가 매우 중요하다는 거잖아요
여기 ‘제물’ 히브리어 ‘미느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또는 감사의 선물 내지는 존경의 선물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로 ‘미느하’가 쓰여진 것은 뭡니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감사와 존경이 담겨야지 형식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 아닙니까? 사람은, 속이려 들려는 사람에게선 진정 감사와 존경이 있는지를 모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도 모르실까요? 히4:12~13절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도 삼상16: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이 볼 수 없는 마음 중심을 보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물을 드리는 가인과 아벨의 중심은 어땠으며 그들이 드리는 제물은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떠했을까요?

4절을 볼까요.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이 말씀을 원문대로 해석하면 양의 첫 새끼들과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을 드렸다는 겁니다. 여기 ‘첫 새끼’ 히브리어 ‘뻬코라’는 ‘제일 뛰어난 것’이란 의미이고 ‘기름’ 히브리어 ‘헬레브’는 ‘지방’ ‘살찌고’ ‘기름지고’ ‘아름다운’이란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아벨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제물은 제일로 뛰어난 것들 중에서 살찌고 기름지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그 마음에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 제일로 뛰어난 것들 중에서도 살찌고 기름지고 아름다운 마음을 담아드렸다는 거지요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히11: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뭡니까?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요 이 제사는 믿음의 제사인데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거고 이 믿음의 제사는 죽었어도 믿음으로 드린 의의제사였다고 증거 하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답니다’ 히브리어 ‘솨아’는 그냥 받았다가 아니라 ‘기쁘게 받으셨다’는 건데 ‘응시하다’ 또는 ‘둘러보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뭡니까? 하나님이 더 나은 제사 믿음의 제사를 드리는 아벨과 그 제물에 주목하시고 응시하고 계심을 발견한다는 거지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더 나은 제사가 뭔지를 말씀하시지요. 요4:23절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가 예배할 때 영과 진리로 아벨처럼 존경과 감사를 담아 믿음으로 드려지므로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응시하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시지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기 ‘받지 아니하신지라’ 히브리어 강한 부정사 ‘로’와 ‘받다’ 히브리어 ‘솨아’가 합해서 ‘로솨아’ ‘받지 않으셨다’는 건데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단호하게 거절하셨다는 겁니다. 가인이 드린 제사는 모르긴 해도 겉으로는 훌륭했을 겁니다. 자기가 드리고도 대견해 할 만큼 뿌듯했을 겁니다. 이만하면 하나님도 감동하시겠지 하면서 만족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가인도 가인이 드린 제물도 ‘로솨아’ 받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고 하잖아요’ 가인의 분한 마음은 얼굴 안색이 분으로 가득할 정도까지 되었다는 거거든요 대충 시시하게 대면대면 드렸다면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까 할 말이 없었을 거지만 자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최고로 드렸고 최상으로 드렸는데 하나님의 거절을 보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사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을 몰랐던 거지요 시51:17절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뭡니까? 이걸 가인이 놓치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뜻밖의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선물도 값진 선물도 아닌 ‘우리의 상한 심령의 제사’랍니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받고자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김을 바라며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해 나오는 바로 그 제사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거 아닙니까?

6절을 보시지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께서 분할 이유 안색이 변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지금 회개하여야 하는 순간인데 이를 놓치고 있는 가인을 질책하시는 거라는 거지요 7절을 보시지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 ‘선을 행하다’ 히브리어 ‘테티브’는 ‘유익하다’ 또는 ‘아름답다’ 아니면 ‘옳다’는 긍정적인 것들의 미완료형 단어거든요 그렇다면 선을 행하는 것 유익하게 되는 것 아름답게 되는 것 옳게 되는 것은 한 순간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뭡니까? 완료가 이루어지기까지 계속해서 지속될 때 이루어지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이런 선한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는 거고 한 번의 제사로 선한 삶으로 바꿔지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주일 예배가 다가 아니라 삶이 예배라는 거 아닙니까? 삶이 예배가 되다가 주일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선한 것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선하지 않다가 한 번 드려지는 예배로 선한 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그 예물이 아무리 훌륭하고 크고 많아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모두 걸러내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용서가 없는 예배 낯을 들지 못한다는 거잖아요 용서가 이루어지는 예배 밝은 낯으로 하나님을 대한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않으면’이라고 경고하잖아요. 이 경고를 무시하게 되면 맹수가 먹이 감을 채서 죽이려고 문에 엎드리고 있는 것처럼 죄가 엎드려 있다는 겁니다. 문을 여는 순간 죄가 너를 원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다스리라잖아요. 그러나 인간은 죄를 다스릴 능력이 없잖아요 그래서 8절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아벨이라고 다를까요? 아벨 역시 죄를 스스로 다스릴 수 없기는 매 한 가지잖아요. 스스로 죄를 속할 수 없으니 양들의 첫 새끼와 그 기름들 같은 대속의 제물이 필요했던 거고 그 희생 제물은 죄를 제어하고 없이하는 능력이 있어 무죄한 자로 선 아벨을 하나님이 받으셨고 그가 드린 제물 또한 받으신 거지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우리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대속제물로 오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죄를 다스릴 권세를 주셨잖아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이를 믿는 믿음을 가진 모든 이에게 죄를 없이하는 길이 되어주시고 죄를 제어하며 살게 하신 거잖아요. 가인과 아벨의 차이가 바로 여기 있지요 열심히 살아온 것은 둘 다 맞고 최선의 제물을 드린 것도 같지요 그러나 대속의 제물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가없고 예수 없는 가정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은 마지막 날 평가 받는 날 뭣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실까요? 대속의 제물이신 예수님이 있느냐 없느냐요 이것은 뭐예요? 죽어서도 증거가 된다는 걸 기억하고 평가 받는 날 예수로 인해 영원한 생명에 거하시는 분들이요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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