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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3:13~17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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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1-01-29 20:05    조회 5,843    댓글 0  
 
벧전3:13~17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믿거든” 2021.1.31.
1월을 마감하는 날이면서 마지막 주일이기도 한 오늘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거든’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3절을 볼까요.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여기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어째 이런 담대함이 나올 수 있을까요? 믿는 구석이 확실하기 때문이지요. 12절에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불꽃같은 주의 눈이라고 하시잖아요. 뭘 불꽃같이 보실까요? 하늘이나 땅이 아니잖아요. 바로 우리를 보시고 나를 보시는데 불꽃같은 눈으로 보신다는 거 아닙니까? 이 세상 그 누가 하나님이 날 보고 계신다는 걸  알까요? 아무도 없지요 그래서 시10:4절에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예수 믿고 깨달은 것이 뭡니까? 날 지키시기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신다는 시121:4절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면 누가 너희를 해하겠느냐 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소망하고 바라봐야 하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거 아닙니까? 고라자손이 지은 시편42편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 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뭡니까? 낙심할 수밖에 없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 예전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고라자손도 권면하더라는 겁니다.

이번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딤전4:10절에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여기 ‘수고하고’ 헬라어 ‘코피오멘’은 ‘수고하다’ ‘코피아오’의 현재형으로 지금도 수고하고 있는 건데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주의 일에 수고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답이 딤전4:8절이지요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렇지요 요즘 운동시설에 가서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살을 빼기도 하고 근육질의 몸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운동하기 전과 운동을 어느 정도하고 난 후 몸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다르다는 걸 눈으로 봅니다. 이것을 바울은 뭐라 이야기 합니까?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거지요 여기 약간의 유익이란 육체와 정신에 한 해서는 분명 유익하지만 뭡니까? 영혼까지는 아니라는 거거든요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섬기는 믿음으로 사는 경건한 삶을 ‘코피오멘’ 지속적으로 수고한다면 어떻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얻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얻는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경건의 삶을 위해 수고하고 힘쓰는 이유는 소망을 세상에 두고 사는 세상 사람들하고는 달리 하나님께 소망을 둔 까닭인 것을 믿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딤전5:5~6절에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고 말합니다. 과부가 된 외로운 여인이 두는 소망이 둘로 나뉜다는 거지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참 과부로 불리는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육체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면 얼마나 산다고 누가 내 인생을 살아 줄거냐 난 이렇게 외롭게 살지는 않을 거야’ 하면서 향락을 따라 사는 과부가 있는데 이렇게 사는 삶은 실제는 살았다는 이름만 있지 실제는 죽은 거라는 겁니다. 여기 참 과부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다’ 헬라어 ‘엘피카멘’은 ‘바라다’ ‘엘피조’의 완료형으로 결코 끊어지지 않는 아주 강렬한 의미의 소망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향락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나이 늙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름다움은 어디로 갔으며 젊음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예전의 넘쳤던 그 정력과 힘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향락을 쫓아 세상과 육체에 소망을 둔 그 강렬함은 세월을 탓하면서 인생의 허무를 거두고 말 것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외로움을 가진 홀로된 참 과부가 기도와 간구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세상의 것과는 다른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복을 얻게 되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번에 딤전6:17~18절에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부 하려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믿는 이미 ‘부한 자들’에게 바울이 뭘 명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높이지 마랍니다.’ 여기 ‘마음을 높이다’는 ‘생각을 높이다’거든요 즉 ‘교만하지 말라’는 거지요 또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라’에서 ‘정함이 없다’ 헬라어 ‘아델로테티’는 ‘분명하지 않다’ 또는 ‘불확실하다’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재물은 절대로 확실하거나 안정적이지 않다는 거지요 잠23:5절에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뭡니까?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할 이유라는 거지요 예수님도 마6: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재물은 신뢰할 것이 못 된다는 거고 소망을 삼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예수 믿는 부자들이 소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 뭐랍니까?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후히 주실 수 있는 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엔 세상과 재물이 줄 수 없는 영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잖아요.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 모두를 당신의 백성에게 공급하시되 후히 주시고 누릴 수 있도록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부자들에게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선한 일 주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렇게 사는 것은 누구와 닮은 것이라는 겁니까? 항상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과 닮은 겁니다.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다’ 헬라어 ‘유메타도투스’는 ‘유’ ‘좋은, 잘’이라는 의미와 ‘메타디도미’ ‘구제하다’가 합해진 합성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유메타도투스’는 ‘대가없이 주다’ 또는 ‘인색함이 없이 주다’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심이 조건도 대가도 없이 주시는 것처럼 뭡니까? 너희도 대가를 바라지 말고 섬기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믿음을 가진 부자들에게 너그러운 자가 되랍니다. 여기 ‘너그러운 자’ 헬라어 ‘코이노니쿠스’는 ‘함께 나누는 자’ ‘공감하는 자’거든요  그렇다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둔 믿음을 가진 부자들은 단순히 물질적으로만 돕지 않고 마음까지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증거한 모든 성도들 또 주야로 간구와 기도로 사는 외로운 참 과부들 그리고 믿음을 가진 부자들 모두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산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17절을 보시지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 의는 성도가 믿고 있는 신앙이요 말씀대로 사는 삶이요 예수님을 뜻하는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이 ‘의’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 헬라어 ‘파스코이테’의 의미가 ‘고난을 겪다’ 또는 ‘고난을 견디다’거든요 ‘의’로 인해 ‘파스코이테’ ‘고난을 겪는’ 것은 분명 괴로움이지만 파스코이테 고난을 겪는 그들은 ‘복 있는 자’라는 거지요 여기 ‘복 있는 자’ 헬라어 ‘마카리오이’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핍박하는 그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말고 근심하지 말 것을 말씀하지요 여기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흔들리지 말라’거든요 그러니까 박해하는 이들이 협박하는 이때 하나님이 바로 역사하시지 않더라도 뭡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자로 인하여 거룩함을 보일 때 이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도대체 너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이 뭐냐고 묻게 될 거고 그때 대답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이 베드로 사도의 권면인 거지요 여기 ‘온유’ 헬라어 ‘프라우테토스’는 ‘부드러운’ 또는 ‘겸손’이라는 의미거든요 ‘프라우테토스’ ‘온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성품인 거지요 그리고 ‘두려움’ 헬라어 ‘포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니까 너희는 어떻게 그 어려운 고난과 위협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흔들리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 물을 때 부드러운 겸손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거지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둔 소망이지요. 하나님께 둔 소망이 어떻게 우리에게 있게 되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지요 그 십자가 예수께서 우리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게 하신 겁니다. 욥14:7절에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이 나무처럼 십자가에서 찍혔으나 무덤을 열고 다시 사신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로 하늘 소망을 갖게 하셨다는 거 아닙니까? 미국의 실업가 중에 스탠리 텐이라는 박사가 회사를 크게 세우고 돈을 많이 벌어 재계에 유명인이 되었는데 1976년에 척추암3기 진단을 받았답니다. 수술로도 약물로도 가망이 없는 그때 사람들은 그가 절망가운데 곧 죽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몇 달 후 스탠리 텐은 병상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출근을 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아니 어떻게 병이 낫게 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아! 하나님 앞에 감사만 했는데 병이 나았습니다. 죽을병도 감사하고 죽게 된 것도 감사하고 매 순간마다 감사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랬는데 나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묻잖아요 당신 속에 있는 소망이 무엇이냐고 스탠리 텐 박사처럼 우리도 말할 수 있지요 ‘나로 죄악가운데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로 인해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었다’ 산림이 울창한 숲에 들어가면 누구나 가슴을 열고 팔을 뒤로 젖히고 힘껏 공기를 들이마시지요 그것처럼 가장 어렵게 시작하는 한 해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을 둘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힘껏 하나님께 둔 소망의 공기를 들이마시자고요 매 순간 매일매일 남은 열한 달을 깊게 들이마시므로 그 소망으로 인해 어둠도 물러가고 절망도 물러가고 괴로움도 아픔도 물러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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