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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40:31절 “여호와 하나님만 앙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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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0-10-23 16:44    조회 5,565    댓글 0  
 
사40:31절    “여호와 하나님만 앙망하면”  2020. 10. 25
요즘 코로나19로부터 모두가 자유롭지 못한 채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두 자리에서 다시 세 자리로 그리고 다시 두 자리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예전처럼 일상생활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국민 모두 갖게 됩니다.
소망을 국어사전에서 ‘바라고 원하는 것’이랍니다. 즉 바램에 대한 실현을 기대하는 것을 소망이라고 말한다는 거지요 운동회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줄달리기잖아요. 우리교회에서는 이 줄달리기를 운동회 맨 마지막 시간에 했던 걸로 기억되는데, 어떻습니까? 굵고 긴 줄에 가운데 선을 중심으로 양편이 모두 줄을 잡고 서 있잖아요 이때 진행자의 호각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손과 발에 힘을 주고 영차, 영차하면서 양편에서 서로 줄을 잡아당기는 승부가 나기전의 줄이 팽팽해졌을 때의 긴장감을 소망이라고 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한쪽의 힘이 달려서 끌려가는 순간 그 팀 모두가 허탈해지잖아요. 이기리라는 소망이 달아났기 때문인데 이긴 쪽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서 어쩌지 못하는 건 이기리라는 소망이 이루어졌기 때문인 겁니다. 히브리어로 ‘티크바’가 소망이거든요 그런데 이 ‘티크바’란 소망의 어원이 놀랍게도 ‘줄’에서 왔다는 겁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잡고 있는 것을 소망이라고 한다는 거지요 자! 본문을 볼까요?

“오직 여호와를 앙망<소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여기 ‘앙망하는 자’ ‘웨코예’는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 또는 ‘위를 쳐다보며 대망하는 자’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누굴 기다리며 대망하느냐하면 예흐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웨코예 예흐와’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요 소망하는 자의 모습이 어떻다는 겁니까? 하나님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붙들고 있는 것과 같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팽팽한 줄을 붙들고 있을 때 그 줄을 붙들고 있는 자가 얻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이라는 겁니다.
여기 ‘새 힘을 얻는다’ 히브리어 ‘야할리푸 코아흐’는 ‘힘을 움트게 될 것’이라는 의미거든요 추운 겨울이 지나고 이른 봄이 오면 아직 땅은 얼었지만 그 언 땅을 뚫고 연하기가 그지없는 새싹이 그야말로 여기저기서 움트는데 그것이 ‘야할리프 코아흐’ ‘새 힘을 얻는다’라는 거지요 어쩌면 그리도 연약한 식물이 삽질도 어려운 언 땅에서 올라올 수 있느냐 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막힘이 없이 지속적으로 솟구쳐 올라온다는 거거든요 이런 모습을 누가 소유하게 된다고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지 못할 때 팽팽했던 소망의 줄이 느슨해진다는 거고 그래서 경험하는 것은 한마디로 무기력이잖아요. 우리 모두 무엇이 필요합니까? ‘야할리푸 코아흐’ 하나님께로 오는 새 힘을 얻는 거지요
예를 들면 창일하여 넘치는 요단강을 이스라엘백성들이 육지처럼 건너가게 되고 견고한 여리고성도 저들 앞에서 무너지게 되면서 마침내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 땅 모두를 차지하게 되잖아요. 이때 이스라엘백성들은 ‘웨코예 예흐와’ 여호와만을 앙망하고 있었다는 거고 저들이 하나님을 향해 잡은 줄은 그야말로 팽팽했다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경험하는 것이 뭐였습니까? ‘야할리푸 코아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 힘이었다는 겁니다. 창일한 요단강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이 둘로 갈라지게 하고 견고한 성 여리고가 이스라엘백성은 손 하나 대지 않았지만 그 여리고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긴장감 있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줄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더라는 거지요 뭡니까? 팽팽한 줄이 느슨해지고 말았다는 거거든요. 이래서 저들이 경험하게 된 것이 뭡니까? 새 힘을 받던 이스라엘백성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무기력했다는 겁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거침없이 물리치면서 가나안을 차지 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는 거 아닙니까? 오히려 주변 국가들에게 침략을 당해 저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치욕적인 억압과 지배를 당하게 되었던 거지요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한 줄을 팽팽하게 붙들고 있었던 사람은 드물지요 그때 이스라엘은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 힘 ‘야할리푸 코아흐’로 인해 강하고 큰 나라가 될 수 있었잖아요. 솔로몬 때 온갖 우상들의 제단들을 세우더니 그 아들 르호보암 때 나라가 둘로 나뉘었단 말이지요.
북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팽팽한 줄을 늘어뜨리게 되면서 새 힘을 받지 못하게 되자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는 아픔을 겪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북쪽 이스라엘이 이렇게 힘없이 멸망당하는 걸 봤다면 남쪽 유다는 정신 차려야 마땅하잖아요. 그러나 남쪽 유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거지요 안타깝게도 하나님 대신에 강대국 애굽을 의지하고 애굽을 향한 애굽의 줄을 팽팽하게 잡고 있었다는 겁니다. 북쪽 이스라엘처럼 남쪽 유다 역시 북쪽에서 내려오는 새로운 제국이지요 앗수르를 침몰시킨 바벨론에 의해서 BC586년에 유다는 멸망하게 되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웨코예 예흐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앙망하시는 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야할리푸 코아흐’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치욕과 아픔과 설움을 당한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늦게나마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줄을 팽팽하게 당기기를 시작했다는 거지요 유대인들의 현실은 포로로 잡혀 온 상태고 그러니 무슨 힘이 있어요 연약하기 그지없지요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편 126편2~3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에게 소망의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게 될 때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시는 새 힘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향한 그 줄을 꽉 잡고 팽팽하게 당긴 채로 눈물로 씨를 뿌리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 새 힘을 얻되 지속적이고 왕성한 야할리푸 코아흐의 역사가 일어나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본문을 보시지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답니다. 이 말의 원문대로 해석은 ‘그들은 독수리들처럼 날개로 올라갈 것’이라는 거지요 히브리어 ‘에베르’가 ‘날개’거든요 그런데 원문에선 ‘에베르’ ‘날개’는 있는데 ‘치다’라는 단어는 없다는 거거든요 독수리는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날개를 펴 기류를 타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유유히 활공을 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날개 치며 올라간다는 말은 ‘웨코예 예흐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날개를 파닥거리는 차원이 낮은 삶이 아니라 여호와께로 새 힘을 얻어서 살기 때문에 차원이 높은 삶이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간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히11: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뭡니까?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잠시 죄악의 낙을 위해 사는 낮은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세상 많은 물질보다 더 귀하게 여긴 모세가 차원이 높은 신앙이란 이런 거야 보여주었다는 거잖아요.
독일이 통일되기 전 1954년도 일인데 이때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동독의 많은 사람들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가는 서독 사람들은 별로 없을 땐데 서독에서 남부럽지 않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카스너목사 부부가 생후 육주 밖에 안 된 아이를 데리고 기독교를 억압하고 있는 공산치하의 동독으로 오히려 들어갔다는 거 아닙니까? 카스너목사는 공산당의 감시와 제재를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과 더불어 장애 아이들을 데려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동서독의 통일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다는 겁니다. 참으로 차원이 다른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한편 라이프치이대학의 물리학박사로 1994년 환경부장관에 2004년 4월엔 기독민주당 당수가 되고 그 이듬 해 2005년 9월 총선에서는 독일 최초 여성총리가 되고 지금까지 4선을 연임하고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앙겔라 메르켈, 바로 카스너목사의 딸이라는 겁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그녀의 아버지 카스너목사의 차원이 높은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의 가정을 독수리가 높이 오르는 것처럼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바꿔주신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 절을 보시면 ‘웨코예 예흐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하신다는 겁니다. 같은 의미를 두 번 반복함으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그들이 걷고 때론 달리는 삶에서 결코 지치는 일이 없을 거라는 거지요
여기서 깨닫는 것이 뭡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를 하나님이 돌보시고 지키신다는 것은 고난을 제거하고 사명을 쉽게 하기 보다는 뭐라는 겁니까?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지치지 않게 하신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소망하는 자가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강하게 하시니까 어려움 속에서도 지치지 않게 하시니까 
코로나19로 사업이 비상사태에 돌입하고 상점들은 문을 닫고 가계의 빚은 늘어가고 너나 할 것 없이 곤비하게 되고 피곤하게 될 때 필요한 것이 뭡니까? ‘웨코예 예흐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야할리푸 코아흐’ 새 힘을 지속적으로 주시는 것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고난이 유익이라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운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차원 높은 신앙은 하나님이 도우시고 함께 해 주심으로 걸어가도 달려가도 곤비와 피곤을 모르고 끝까지 나아가 승리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골1:11~12절을 함께 믿음을 가지고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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