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    |    |  
회원 로그인
회원 가입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가입으로 서비스 약관개인정보 보호 정책 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SUNYOU CENTERAL CHURCH
수요예배 설교원고

bo_title_img1.png

7:14~25절 “성도의 내적갈등”  
카카오톡 카카오 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밴드 주소복사
   김진수   작성일 22-05-04 01:07    조회 698    댓글 0  
 
롬7:14~25절 “성도의 내적갈등”  2022.5.4.
14절을 볼까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율법이 신령하다는 걸 밝히고 있지요 여기 ‘신령’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에 속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기원이 신적이라는 사실이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거지요 뭡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율법은 이런 거룩한 신적속성사람을 악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도 영원히 이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육신에 속하여’ 이 말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거지요 인간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할 때 죄 아래 팔렸답니다. 뭡니까? 죄 아래에 팔렸으니 죄의 지배 받는 종이 되었다는 겁니다. 죄의 종이 되었을 때 롬8:7~8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필린 ‘나’는 누굴 말하는 걸까요? 당연히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낸 바울사도임에 틀림이 없다는 거지요 이 말을 하는 바울이 예수 믿고 중생하였고 성화의 단계에 있다는 겁니다. 중생하지 못하면 아예 죄로 인하여 자주 넘어지는 자신을 보면서 갈등하는 법이 없다는 거거든요 지금 바울은 중생은 하였지만 여전히 죄의 오염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서 자신의 의지대로 온전한 선을 행하지 못함으로 갈등하는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을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아무리 대사도라 할지라도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15절을 보자구요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여기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해 갈등하는 말이라는 거잖아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하더라는 거지요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뭡니까? 거룩한 성령을 따라 살기보다는 타락한 본성을 따라 자신이 미워하는 죄를 짓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기도하러 나가야지 그러나 실제로는 텔레비전 앞에 누워서 있는 거지요
16절을 보시지요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7:12절에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또 롬7: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한데 반하여 우리는 어떻다는 겁니까? 그 선하고 의롭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보다는 육체가 원하는 삶을 살기에 갈등한다는 거거든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육체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거거든요 무엇을 깨닫습니까? 인간의 힘과 의지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죄 아래 매인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선이요 의라는 사실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마다 그 지극히 높은 선은 정죄한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이란 우리 인간이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선이라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는 거거든요
17절을 볼까요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 ‘내 속에’ 헬라어 ‘에모이 엔’ 내 속에 무엇이 살고 있어요? ‘죄’ 헬라어 ‘하마르티아’가 살고 있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거하다’ 헬라어 ‘오이케오’는 현재형 단어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뭡니까? 성도는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죄가 떠나지 않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뭡니까? 이것을 성도 스스로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속상해 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죄를 분리시키지 못하고 죄와 더불어 불편한 동거를 용납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18절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을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다는 겁니까?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거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 육신’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 육신은 육체가 아닙니다. 육신으로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사륵스’ ‘죄에 반응하는 타락한 본성’을 말한다는 거지요 이 타락한 본성에 당연히 선이 거할 수가 없다는 거잖아요 여기서 해마다 결단하는 것의 무능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서 결단하지만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타락한 본성인 사륵스 육신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란 말이 나오게 되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이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마26: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거지요 그렇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죄가 육신 사륵스, 타락한 본성을 주장하여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23절에 뭐랍니까?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그리고 19절에서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난 증거가 뭡니까? 선을 원한다는 거고 악을 미워하고 원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거듭났다고 타락한 육신의 본성까지 멸절한 것은 아니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타락한 육신의 본성으로 인해 마음이 원하지 않는 죄를 범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악을 행한다에서 ‘악’ 헬라어 ‘카코스’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의미거든요 완전함에 도달치 못하는 것이 악이거든요 행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과 분리시키는 것 이것이 죄악의 결과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고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겁니다. 20절에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 모두 알자구요 우리가 죄를 짓는 일이 내가 아니고 나는 선을 원하고 바라지만 내속에 죄가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여 나로 자꾸만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더라는 겁니다. 21절을 보시자구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뭘 깨달았답니까? 내 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것과 더불어 악도 함께 있는 사실이라는 거지요
22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여기 육신과 대조되는 것을 소개하지요 그것이 뭡니까? 헬라어 ‘토 에소 안드로폰’ 내 속사람이랍니다. 거듭난 자아를 말하지요 속사람, 거듭난 자아가 즐거워하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의 법이랍니다.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그런데 내 지체 속엔 속사람, 마음의 법과 싸우는 다른 법이 있는 데 죄의 법이라는 거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뭡니까? 번번이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을 이기고 성도를 노예로 삼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지요 그래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곤고한 사람’ 헬라어 ‘탈라이포로스’ ‘비참한 사람’이란 의미거든요 무엇이 비참한 사람이 되게 합니까? ‘자신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지요 25절을 보자구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뭡니까? 내 힘 가지고는 이길 수 없는 육신과 죄의 법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일오전 설교동영상
24년 4월 21일 주일 예배 영상
사사기 1:16~21절 김용우 목사
2024년 4월 21일
교회앨범
비전센터 앞에 주차장이 이쁘게 완성되… 
동영상앨범
22년 낙도선교회
- -
-
선유중앙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선유중앙교회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회원가입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전체 최근게시글
  • 선유중앙교회 SNS를 방문해 보세요
    교회명 : 선유중앙교회 | 담임목사 : 김진수 | 주소 : 10811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독서울 5길 18-30
    교회전화 : 031-954-1080, 953-5977 | Fax : 031-954 1040 | 목사관 : 031-952-2097 | 이메일 주소 : yegrim@hanmail.net
    Copyright ©1955~2024   sunyou.or.kr. All Rights Reserved.
    031-954-1080
    031-954-1040
    yegrim@hanmail.net
    031-954-1080
    선유중앙교회 전화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