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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34:1~10절 “여호와께 피하고 찾고 경외하는 자에게 따를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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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0-05-20 15:28    조회 7,174    댓글 0  
 
시편34:1~10절 “여호와께 피하고 찾고 경외하는 자에게 따를 복” 2020. 5. 24
이스라엘 왕 사울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다윗은 이젠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까지 자신의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고 그때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전에 우리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을 죽인 자가 다윗이 아니냐 그렇다면 원수 다윗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성토로 인해 위급함을 느낀 다윗이 귀신이 들려 미친 것처럼 행동함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표제에 ‘아비멜렉’은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블레셋 왕 아기스를 일반적인 명사로 부를 때 ‘아브’ ‘아버지’ ‘멜레크’ ‘왕’이거든요 그래서 블레셋 왕을 부를 때 ‘왕의 아버지’ ‘아비멜렉’이라고 했다는 거지요 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척 할 정도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벗어난 후 다윗이 그 때 그 일을 기억하면서 지은 시가 바로 오늘 시편34편이라는 겁니다.

1절을 볼까요.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우리말로 송축과 찬양은 같은 말이잖아요 ‘테힐라토’가 ‘기뻐 찬양하다’거든요 우리말에선 ‘내가 송축한다.’ 그렇다면 테일라토가 되어야 하는데 원문에선 ‘테힐라토’가 아닌 ‘아바라카’라고 말하고 있다는 거지요 ‘아바라크’의 원형이 ‘빠라크’인데 ‘무릎을 꿇다’ 또는 ‘예배드리다’는 의미거든요 그래서 원문대로 한다면 위기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아바라카’ 무릎 꿇어 예배드리며 입술로 “테힐라토‘ 기뻐 찬양 드린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항상 이랍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위기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다윗은 예배드림과 찬송의 삶을 항상 매일처럼 할 것이라는 거룩한 결심 말하고 있는 거지요 그 다음 2절을 보세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과거 수도 없이 곤고했던 자신을 그때마다 위기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자랑할 때 현재 곤고한 자리에 있는 이들이 듣고 기뻐할 것이라는 거지요 왜요? 희망이 생기니까 이번엔 3절에서 뭘 말씀하나 볼까요.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곤고한 데서 건짐 받았던 자신과 지금 곤고한 처지를 당하고 있지만 나의 간증을 듣고 희망이 생긴다면 뭡니까?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높이자고 말하지요 여기 ‘함께’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원문에선 단어가 다르다는 거지요 먼저 ‘함께’는 ‘엣티’ ‘더불어’이고 뒤에 ‘함께’는 ‘야흐따흐’ ‘같은 방식으로’라는 의미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지요. 다윗은 자신과 더불어 하나님을 광대하시다하자 그리고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높이자라고 초청하고 있다는 거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깨닫게 된 것이 뭡니까?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인간적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 이런 모습으로 죄 가운데 살면서 마귀가 좋아하는 쪽으로 살다가 멸망당할 우리였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우리를 벧전1: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자신의 목숨으로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마귀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셨으니 이 곤고한 데서 건짐을 받은 우리 영혼이 할 일 역시 다윗처럼 ‘여호와를 자랑’하는 것이요 항상 예배와 찬송을 드리는 자가 되고 이 곤고한 데서 구원 받은 무리와 함께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선포하고 구원하신 주의 이름을 높이는 일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4절을 볼까요.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수도 없이 곤고함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고 그래서 하나님 여호와를 자랑하고 항상 예배하는 자 찬송하는 자로 살자는 요청과 함께 다윗은 자신이 겪은 놀라운 은혜를 이야기하지요. 뭡니까? 여호와께 간구 할 때 응답하셨고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셨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윗이 아비멜렉이라고 불리는 블레셋왕 아기스에게 피했을 때 그의 신하들이 골리앗을 죽인 장본인이 아니냐 죽여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다윗이 겪었던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었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런 위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거고 그런 다윗을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거거든요 이런 자신의 경험에 비춰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를 돌보시고 구원하신다는 거지요 여기 ‘내가 간구하매’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고’ 이 법칙에 대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구하라 찾으라 두들기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요 만날 것이며 열릴 것이니’ 라고 다시금 확인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다윗을 처형하라는 아기스의 신하들의 쇄도하는 요청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다윗은 기도했고 그때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두려움을 몰아내주셨다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통해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두려운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였던 겁니다. 그 다음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건짐을 받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지요 이 같은 경험으로 인해 다윗은 두려움에 빠져있는 자들을 향해 괜히 두려움에 젖어 있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기도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는 자가 경험하게 되는 축복에 대해서 5절을 보시지요.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여기 주를 ‘앙망하다’ ‘힙비투’는 ‘유의해서 바라보다’ 또는 ‘주목하여 관심을 보이다’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라는 거지요 그 결과가 뭐예요? ‘광채를 내었다’는 거고 그 얼굴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간구하게 되면 먼저 마음에 두려움이 물러가고 아직 대적들로부터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얼굴에 수색이 사라지고 오히려 평안의 빛을 띠게 되었고 결코 부끄럽지 않은 담대함에 찬 얼굴로 바뀌었다는 거지요 이것은 한나가 경험한 거잖아요. 기도하기 전에 상당한 분노와 슬픔에 찼었던 그녀가 기도하고 난 후엔 전혀 얼굴에 수색이 없었다는 거고 분노 대신 평안함으로 바뀌었다는 거거든요 우리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막11: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가 뭡니까? 하나님께 맡김을 통해서 마음이 바뀌고 얼굴이 바뀌게 되고 상황까지 바뀌게 되는 것이 기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절을 볼까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기 ‘환난’ ‘차로타이우’는 ‘압박하여 죄어오다’니까 환난은 곧 고통을 동반하고 있음을 보지요 이런 죄어오는 압박으로부터 구원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뭐래요? ‘부르짖는 기도’랍니다. 이렇게 부르짖음으로 해서 얻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죄어오는 압박을 끊어주시고 자유하게 하시는 보호가 뒤따랐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7절에서 말씀하지요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 하나님께서 보낸 여호와의 천사들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잖아요.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발람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나귀가 앞으로 나가질 못합니다. 왜였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인 이스라엘백성을 보호하시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여호와의 사자를 본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셔서 구원하시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그랬잖아요 양 옆에 군인 둘이서 함께 쇠사슬에 같이 묶여 있었고 밖에 또 지키고 있는 군인이 있었고 어떡합니까?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잖아요. 그리고는 빼내시잖습니까? 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을까요? 그러므로 누가 복이 있는 자라고 말합니까? 8절을 보시지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 ‘선하심’ ‘토브’는 ‘모든 좋은 것’이거든요 그 좋은 걸 맛보랍니다. ‘하나님의 좋은 걸 체험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누가 ‘아쉬레’ ‘복이 있는’ 자입니까? ‘하나님께 피하는 자’입니다. 여기 ‘피하다’는 ‘도망하기’보단 ‘신뢰하고 소망하는’ 걸 말씀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좋은 것 토브를 맛보게 되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9절에서 뭐랍니까?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그리고 10절에선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기 ‘젊은 사자’ ‘케피르’거든요 그런데 원문은 ‘케피르’의 복수 ‘케피림’으로 사실은 ‘젊은 사자들’이지요 아프리카 초원에서 젊은 사자들이 굶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나 그들은 궁핍할지라도 뭡니까? 여호와를 찾는 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로 에흐싸르’ ‘로’는 강한 부정사요 ‘에흐싸르’ ‘부족함’이거든요 뭡니까? ‘로 에흐싸르’ ‘부족함이 절대 없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전혀 부족함을 모르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저 평온한 것이 아니지요 삶의 아픔이 있지만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경제적으로 겪는 물질적 어려움이 있지만 뭡니까? 그런 중에도 부족함이 없음을 말하는 거라는 거지요 이것이 어째 가능할까요? 롬8:28절이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겐 모든 것이 합력해서 좋게 아주 좋게 너무나 좋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 걸 믿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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