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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5:1~5절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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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19-11-29 16:20    조회 6,856    댓글 0  
 
시15:1~5절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냐”  2019.12.1.
본시의 표제에서 저자가 다윗의 시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연주방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고  있네요.
1절을 볼까요.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다윗은 ‘예흐와여’ 판단의 주관자가 여호와시라는 사실을 먼저 언급하고 있음을 보지요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보실 때 과연 누가 주의 장막에 머무를 수 있는 자이며 여호와께서 판단하실 때 주의 성산에 살 수 있는 자를 누구로 보시느냐는 겁니다. 여기 주의 장막이라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막을 말하면서 예배처소를 의미한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주의 성산이라면 성막이 있는 시온산을 말하는데 훗날 여기에 예루살렘성전이 세워졌거든요 그러니까 주의 장막에서 하나님과의 아름답고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이들이 주의 성산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거지요
여기 ‘머무를 자’ 히브리어 ‘야구르’는 ‘여행하면서 유하는 자’라는 의미이고  성산에 ‘사는 자’ 히브리어 ‘이쉬콘’은 ‘정착하여 사는 자’라는 의미니까 뭡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시온산 예루살렘에 살면서 여행하듯이 주의 장막을 찾는다는 그런 말이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머무르다 야구르’와 ‘산다 이쉬콘’ 이 두 낱말의 시제가 모두 미완료형이라는 사실이 뭡니까? 계속해서 반복되는 걸 의미한다는 거지요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계속적으로 느끼며 이 축복 속에 거할 자가 누구냐는 거지요 그렇다면 누굴 말하는 걸까요?

2절을 볼까요.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먼저 정직하게 행하는 자랍니다. 여기 ‘정직하게’ 히브리어 ‘타밈’은 정직이라는 의미보다 완전하다라는 말이 더 가깝다는 거거든요 이 ‘타밈’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창6:9절에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기 당대에 ‘완전한 자’ ‘타밈 하야’거든요 노아에게 ‘완전하다’ ‘타밈’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부르실 때 그 당시 사회적 현상은 어떠했습니까? 죄악이 가득 찼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지 못한 가운데 있었을 때 하늘의 새벽별이 유난히 빤짝이듯이 뭡니까? 노아는 ‘타밈하야’ ‘완전한 자’였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지요 하나님의 집에 머무르고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세계 속에 살기 위해서는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데 이 세상에 누가 완전한 자입니까? 오직 한 분 예수님밖에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뭡니까?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장막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의 성산에서의 하나님의 보호와 다스리심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롬3:10절에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게 인간의 현실이지요. 그런데 롬3: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뭡니까? 율법을 주셨을 때 하라 하지마라 지침을 주셨지만 인간이 다 지키지를 못하더라는 거잖아요 오히려 죄만 드러날 뿐 그래서 사람에게 뭐가 나타나셨대요? ‘하나님의 한 의’ 그것이 뭔지를 22절에서 말씀하지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얻을 수 있다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그 다음 절 24절에서 뭐랍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로 말미암아 완전하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이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죄가 없어졌고 완전해져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를 자격이 주어졌고 하나님의 성산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보호하심으로 사는 자들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주의 장막에 머무르고 하나님의 성산에서 살 수 있는 자가 누구랍니까? 공의를 실천하는 자랍니다. 이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정의의 개념이 분명 아니지요 공의를 실천한다는 말은 의를 행한다는 거잖아요 세상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정의로운 사람이 주의 장막에 머무를 수 있고 하나님의 성산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공의를 행하는 자’가 누굽니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가 뭐라고 했나요? ‘예수그리스도’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을 행동으로 보이는 자가 뭡니까? 하나님의 장막, 예배의 처소인 성전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거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보호가 있는 하나님의 성산에서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네요. 믿음을 가졌으면 믿음으로 사는 데까지 나가라는 거지요 눅14:29절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예수로 그 기초를 쌓아놓은 거라는 거지요 그대로 계속 있으면 어떻다구요. 사람들이 비웃는다는 겁니다. 예수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다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이요 예수로 산다는 것은 비로소 복음이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예수님 없이는 뭡니까?
공의로 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다음 주의 장막에 머무르고 하나님의 성산에서 살 수 있는 자가 누구랍니까? 진실을 말하는 자랍니다. 어디로부터 ‘그의 마음에’ 히브리어 ‘삘르바보’는 그의 마음 안에서거든요 그러므로 원문에서의 의미는 ‘그의 마음에 있는 진실, 진리를 말하는 자’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다윗이 지금 이 노래로 전하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진실이요 진리’를 마음에 품고 있지만 말고 뭡니까? 입으로 말하라는 거지요 사기꾼은 자기 마음 속 거짓으로 차 있잖아요. 이것이 입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속이잖습니까? 우리는 예수꾼이잖아요 우리 마음 안에 가득한 진리이신 예수가 우리 입 밖으로 나와야지요. 그렇지요 우리의 삘르바보 마음 안에 있는 진리가 입술을 통해서 나올 때 엄청난 역사가 일어남을 사도바울이 증거하잖아요. 롬1: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진리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겐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거고 이어진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진리의 복음, 예수복음에 반드시 나타나는 의가 뭐예요? 하나님의 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주는 의지요 그래서 그 믿음으로 살게 하신다는 거거든요

3절을 볼까요.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주의 장막에서 주와 더불어 교제하며 하나님의 동산에서 거하는 자라면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을 말하는 거지요 그런데 허물하다는 히브리어 ‘라갈’은 ‘따라 걷는다’는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혀가 걸어 다닌다’인데 혀가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리나라 속담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니구나 사실은 히브리어 ‘라갈’에 의하면 발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말해놓고 뭘 걱정합니까? 온 교회가 다 알까봐 그러나 주의 장막에서 주와 더불어 교제하며 하나님의 통제와 보호속에 있음으로 달라지는 것은 그분을 전하는 삶만이 아니라 혀가 달라진다는 거 아닙니까?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비방하지 않고
나는 직설적인 성격이라고 그래서 돌려서 말하지 않고 바로 말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나는 내 성격대로 사니까 상관없지만 그 직설에 당하는 사람은 뭡니까? 크게 상처를 입게 되는 거지요 그 받은 상처를 회복하려면 무척이나 힘들어 하지요 그러나 온유한 말 한마디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위력이 있다잖아요.
4절을 보시지요.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동산에 사는 자들은 영적인 눈이 있어서 망령된 자를 멸시한답니다. 여기 ‘망령된 자’ 히브리어 ‘니므아쓰’는 ‘버려진 자’ 또는 ‘내 쫓긴 자’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서 버려지고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지 못하는 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예수 없는 자요 예수 믿지 않는 자라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해 존대한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좀 힘이 들고 손해가 되는 듯해도 뭡니까? 반드시 그 약속을 갚는다는 거 아닙니까?
마지막 5절이지요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주의 장막에 머물며 주의 동산에 사는 자들은 돈으로 사회 생활하는 데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뭡니까? 돈에 깨끗한 모습을 말하지요 내가 가진 돈으로 이웃을 힘들게 하지 않는 다는 건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히브리어 ‘임모트’는 미끄러지다 또는 탈선하다거든요 그러니까 어디로부터 입니까? 하나님과 교통하는 여호와의 장막으로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고 보호가 있는 하나님의 동산으로부터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거니까 그렇다면 뭡니까? 하나님과의 영원한 동행이잖아요 인간 최대의 행복이 뭘까요? 주의 장막에 머물며 주의 동산에서 살며 주와 함께 사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일이 성취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예수로 살고 예수를 전하고 예수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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